한국전력, 송전망 4층 철탑 건설 추진
기존 2층 철탑에 병합 … 신설 선로 최소화
계통 운영방식 바꾸고 송전망 효율개선 절실
정부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첨단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면서 전력망 운영체계 전반을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단순히 발전소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폭증하는 전력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고, 송전망과 계통 운영을 함께 고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4년 국회입법조사처와 한국전기연구원(KERI)이 각각 발표한 보고서는 공통적으로 “앞으로는 발전소를 얼마나 많이 짓느냐보다 생산된 전기를 얼마나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특히 미국은 실시간 계통운영과 대규모 송전망 투자를 병행하고 있는 반면 국내는 여전히 송전망 건설과 계통 운영 모두 개선이 필요한 단계라는 분석이다.
◆미국, 30분단위 실시간 계통평가…송전망 효율높여 = 국회입법조사처는 미국의 계통 운영방식을 국내가 참고할 만한 대표 사례로 제시했다.
미국은 북미전력신뢰도공사(NERC)를 중심으로 최소 30분 단위의 실시간 계통평가를 실시한다.
계통 상태를 지속적으로 분석한 뒤 실제 위험이 높아질 경우에만 강화된 신뢰도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모든 상황을 일률적으로 규제하기보다 실시간 데이터에 기반해 위험도를 평가하고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에너지관리시스템(EMS)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실시간 상정고장 분석체계도 아직 미흡한 수준이라고 보고서는 평가했다.
계통 운영에서 사람의 경험과 수작업에 의존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 보다 정교한 디지털 운영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전기연구원도 미국 사례를 소개하며 다양한 계통 안정화 기술 도입을 제안했다.
대표적인 것이 고속밸브제어(Fast Valving) 기술이다. 발전기에 이상이 발생하면 증기밸브를 매우 빠르게 제어해 발전기의 과도안정도를 높이는 기술로 미국 발전소에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흡수해 계통을 안정시키는 동적제동저항기(Dynamic Braking Resistor), 발전소 인근에 설치하는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 등도 발전제약을 완화할 수 있는 기술로 제시됐다.
또 다른 대표 사례는 수요반응(Demand Response·DR) 제도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전력공급이 부족한 시간대에 대형 공장이나 데이터센터가 일시적으로 전력 사용량을 줄이면 경제적 보상을 제공한다. 공급설비를 계속 늘리는 대신 수요를 유연하게 조절해 계통 부담을 낮추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수요반응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AI 데이터센터가 급증하는 환경에서는 고객참여형 부하차단과 같은 유연성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전력시스템 전체 다시 설계해야 = 전문가들은 송전망 부족 문제가 단순히 송전선 건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전력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는 발전소를 건설한 뒤 송전망을 연결하는 방식으로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처럼 대규모 전력을 24시간 사용하는 시설이 늘어나고, 재생에너지 비중도 빠르게 확대되면서 계통 운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송전망 확충과 함께 전력 소비 분산, ESS 확대, 계통 안정화 기술 도입, 실시간 계통 운영체계 구축 등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것이 두 보고서의 공통된 결론이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실시간 계통 감시체계 구축과 N-2 사고 확률 데이터 축적, EMS 활용 확대를 통해 실제 계통 위험도에 기반한 운영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지역별 계통 혼잡비용 제도를 도입해 이를 송전망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고, 발전사업 허가와 송전망 건설을 연계해 특정 송전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전기연구원도 HVDC 확대를 비롯해 ESS와 양수발전, 고장파급방지장치(SPS) 고도화, 고속밸브제어, 동적제동저항기 등을 함께 활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데이터센터와 대규모 산업단지를 발전소 인근에 분산 배치하고 고객참여형 수요반응을 확대하면 장기적으로 송전망 투자 부담도 줄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전 “신뢰도 완화는 신중해야” 입장 = 다만 신뢰도 기준 완화를 둘러싸고는 신중론도 적지 않다.
한국전력은 N-2 신뢰도 기준 개선에 대해 “전력계통 신뢰도 기준을 완화하면 발전제약 해소 등을 통해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도 “대규모 정전 위험을 어느 수준까지 사회가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신 한전은 송전선 효율을 높이는 다양한 대안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4회선 철탑이다. 현재 국내 송전선로는 대부분 2회선 철탑을 사용하지만 기존 철탑에 추가 회선을 집약해 4회선을 운용하면 신설 선로를 최소화하며 주민수용성의 어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
한전 관계자는 “계통상 2회선씩 2개 노선을 건설하는 대신 4회선 1개 노선으로 구축하면 국토 이용 효율을 높이고 철탑 설치 수량도 줄일 수 있다”며 “공사비도 약 10% 이상 절감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철탑 높이가 높아져 경관 훼손 우려가 커지고 유지보수 작업에도 제약이 발생하는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미국, AI 시대 맞아 송전망 투자 경쟁 = 미국은 AI 시대를 맞아 송전망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보고 대규모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 전력·가스 전문매체 유틸리티 다이브(Utility Dive)에 따르면 세계 최대 데이터센터 밀집지역인 버지니아를 관할하는 PJM은 데이터센터 증가로 송전선 혼잡이 심화되자 올해 2월 약 118억달러 규모의 송전망 확충 사업을 승인했다.
최근 폭염 기간에는 데이터센터 증가와 송전망 혼잡이 겹치면서 계통 조정비용이 순간적으로 MW당 2만8000달러까지 치솟는 등 송전망 부족이 전력시장 비용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텍사스도 대규모 송전망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최근 AEP 텍사스에 최대 32억6000만달러 규모의 금융지원을 승인했다.
약 4500㎞의 신규 송전망 구축과 기존 송전선 용량 확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AEP 텍사스는 텍사스 남부와 서부 지역에서 송배전 사업을 담당하는 회사다.
로이터통신은 텍사스 전력신뢰성위원회(ERCOT)가 AI 데이터센터와 제조업, 전기차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최대 1000억달러 규모의 송전망 투자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발전설비 확충만으로는 AI 시대의 전력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송전망과 계통 운영을 국가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고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 경쟁력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발전소를 확보했느냐보다 생산된 전기를 필요한 곳에 얼마나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송전망은 더 이상 전력회사의 설비가 아니라 국가 산업 경쟁력과 에너지 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기반시설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