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네덜란드 병’ 나라의 저력, 회복탄력성

2026-07-30 13:00:02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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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국가 표어는 ‘나는 버틸 것이다(Je maintiendrai, 중세프랑스어 슬로건)’이다. 국장(國章)에도 적혀 있다. ‘국부’ 빌렘 1세가 1885년 연합왕국을 출범시키면서 채택했다. ‘생존’이 최대 화두였던 네덜란드의 역사를 압축한 표현이다.

‘낮은 땅의 나라(Netherlands)’라는 뜻의 이름에도 이 나라의 고단한 운명이 담겨 있다. 국토의 상당부분이 바다 수면보다 낮은 저지대다. 언제 수몰될지 모르는 불안과 싸우며 해안가에 둑을 높이 쌓아올려야 했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이 지배했던 유럽의 양대 강국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토면적이 대한민국의 41%인 4만1543㎢, 인구는 1835만명(2025년 기준)에 불과하다.

그런 나라가 세계의 물류중심지이자 반도체 장비 제조 등의 첨단산업 국가로 1인당 국민소득 7만3700달러(2025년, 대한민국 3만6855달러의 두 배)의 경제력을 쌓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전세계가 경제학 교과서에 실어가며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는 대실패를 두 차례나 겪었다.

첫째는 1636~1637년에 이 나라를 뒤흔든 튤립 투기 파동(Tulip Mania)이다. 세계 최초의 투기 거품 사례로 꼽히는 사태는 16세기 말 튤립이라는 희귀한 꽃이 오스만제국(튀르키예)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줄무늬가 있는 희귀 품종은 귀족과 부유층의 신분을 상징하는 사치품이 됐고, 번식이 어려워 가격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꽃을 감상하기보다 ‘나중에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는 기대로 구입했다.

튤립 가격은 한달 새 50배까지 뛰어올랐고, 일부 품종은 숙련 노동자 연봉의 10배 이상 가격에 거래됐다. 튤립 알뿌리(구근) 하나가 암스테르담 운하 앞의 집 한채 가격보다 비싸졌다. 그러다가 ‘튤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거품이 순식간에 꺼졌다. 튤립 값은 최고치 대비 수천 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고, 투기판에 뛰어들었던 사람들 상당수가 파산했다.

‘바세나르 협약’으로 ‘네덜란드 병’ 극복

두번째는 1970년대 이 나라를 집어삼킨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 사태다. 1959년 네덜란드 북부에서 대규모 천연가스 매장지를 발견한 게 발단이었다. 가스 채굴 및 수출로 막대한 외화를 손에 쥐게 된 정부는 제조업 경쟁력 유지를 뒷전으로 미뤘고, 은행 등 금융회사들의 자금과 우수한 인력도 천연가스산업에 집중됐다. 다른 산업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가운데 정부는 ‘가스 달러’를 믿고 사회복지비용을 대폭 늘렸는데 이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 네덜란드의 실업률은 1.1%에서 5.1%로 상승했고, 기업투자는 급격히 감소했다. 경기침체 속에서 물가만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하면서 네덜란드는 1980년대까지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놀랍게도 네덜란드는 두 사태 모두에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튤립사태 때는 거품붕괴로 한 동안 혼란에 빠지기는 했지만,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이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거점으로 아시아 무역을 주도했던 동인도회사가 건재했고, 귀금속 세공 등 세계를 평정하고 있던 산업들이 건재했던 덕분이다.

‘네덜란드 병’으로부터의 탈출은 더 극적이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까지 더해져 실업률이 치솟는 등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노사갈등이 극심해졌다. 잦은 노사 간 대립은 기업들의 투자의욕을 더욱 위축시켰고,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노동계의 불안과 불만은 더 커졌다.

네덜란드는 이런 악순환을 진정한 노사 상생의 ‘바세나르 협약’(1982년 11월)으로 끊어냈다. 협약의 핵심은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사용자(기업)들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시간제 일자리를 확대해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한다’는 것이었다. 노사자율의 이 대타협은 네덜란드에 실업률 감소와 기업경쟁력 회복을 가져왔다.

정치리더십과 노사 상생문화 절실한 때

한국은행은 최근 우리 경제가 유례없는 반도체 초(超)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과 관련, “특정 산업만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다른 산업을 위축시키는 ‘반도체판 네덜란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실제로 올해 2분기 우리 경제가 전년 대비 3.7% 성장하는 등 반도체 질주의 덕을 보고 있지만 고용시장 위기는 갈수록 더 악화하고 있다. 15~29세 청년층의 절반(48.6%)이 학교를 졸업한 지 1년이 넘도록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최근 통계(5월 경제활동인구조사)가 상황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여러 경제·산업지표는 우리나라가 이미 ‘네덜란드 병’에 걸려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조 감염국가’ 네덜란드가 놀라운 회복탄력성으로 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이다. ‘바세나르의 기적’을 이끈 정치리더십과 노사 상생문화가 대한민국에도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경제사회연구원 이사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