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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갇힌 산업안전, 양자역학에서 배우기

2023-11-24 16:25:00 게재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

얼마 전 상온 초전도체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초전도체는 전기 분야의 큰 숙제인 저항을 해결함으로써 현재와는 다른 세상을 열게 될 물질이다. 파생효과를 생각하면 전기사용 전후 보다 더 큰 변화가 예상된다. 꿈일 줄만 알았던 양자컴퓨터도 상용화될 것이고, 산업현장의 생산방식과 그로 인한 재해 역시 다른 상황을 맞을 것이다.

과학은 절대적 진리가 아닌 자연현상에 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초전도체 이해에 필요한 양자역학은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직관을 넘어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놓인 물질의 속성과 운동을 다루는 학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자인 원자를 야구장이라 가정할 때, 양자는 야구공 정도 크기라고 이해하면 개념적으론 쉽지만,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현재 물리학계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다. 그러나 전자기력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사회는 양자역학이 꼭 필요했다.

고전 산업안전

산업안전 분야도 물리학계와 유사한 상황이다. 뉴턴의 고전 물리학으로 던져진 돌과 같은 물체의 운동 즉, 힘이 가해진 물체의 미래 위치와 이동거리를 예측할 수 있게 됐다. 하인리히로 대표되는 고전 산업안전론은 당시 신뢰도가 낮았던 기계·설비의 불안전 상태, 작업자의 불안전 행동을 사람의 감각적 점검으로 찾아내 표준에 맞도록 개선함으로써 1930년대 서구사회의 산업재해 감소에 크게 기여했다. 하인리히의 도미노 이론은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훌륭한 통찰이었다. 하지만, 전체 7만여 건에 불과한 상해보험 기록에서 작업자의 불안전한 행동을 전체사고 88%의 원인으로, 상해 정도 만을 기준으로 업종 등의 작업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1:29:300이라는 발생 비율을 기초로 한 단순한 논리였다.

위험의 종류와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현재의 다양한 업종 특성, 규모에 따른 복잡성과 결합성과 같은 요소들을 고려할 수 없었다. 더욱이 기계·설비의 신뢰도는 당시와 비교 불가능한 수준으로 향상되었고,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TMI) 원전사고를 계기로 얻게 된 인지공학적 이해로는 하인리히 이론은 이미 그 역할을 다했다. 스위스 치즈 사고모델의 저자인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은 휴먼 에러(Human Error, 불안전 행동)은 사고의 원인이 아닌 결과로, 그리고 규칙 의존은 사고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이 예측할 수 없는 양자의 위치와 운동에 확률분포 개념을 적용했다. 이것이 정작 양자역학의 장을 연 아인슈타인도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동의하지 못한 1924년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 해석은 전자기력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사회를 열었고 지금도 잘 활용되고 있다. 일어날 사고는 일어난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사고의 경우도 확률분포에서 사고예방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전안전을 넘어서려면

고전 산업안전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재해율이 높은, 생산과정이 단순한 중소규모 생산현장들의 재해율을 일정 수준까지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아직 필요하다. 그 영역은 아직 기본적인 안전규칙이 규범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낮은 발생 확률의 예측 불가능한 대형 산업현장 사고는 고전 안전론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최근 대형 산업현장의 사고들 대다수가 안전규칙 기준의 감각적 안전점검으로는 사고 위험의 사전 발견이 불가능한, 구조적이거나 내부자들의 의사결정 오류로 인한 시스템적 사고다. 이런 사고의 예방에 작업 감시자 증원 같은 시도는 오히려 사고발생 확률을 증가시킨다. 건설기계 신호수를 포함, 작업 감시자들에게 발생한 많은 산업재해가 그 증거다. 위험성 평가 등 정부의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포함된 대책의 대다수가 성과 검증이 되지 않은 고전의 각색물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안전은 고전의 우물에 갇혀 있다.

대한민국 산업안전은 서구와는 달리 정부 주도로 시작됐다. 상황이 우리와 다른 일본의 법규를 차용해 1981년에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과 국립대학에 안전공학과를 개설한 것이 산업안전의 시작이었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정부가 산업안전을 우물에서 건져내야 한다. 그 시작은 사고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집계 수준의 산업재해 통계이지만 확률 분포를 깊게 들여다보면 그간의 많은 오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사고의 배경요인을 찾기 위해 정부는 물론, 사회구조와 관례 영역까지 살펴야 한다. 적정임금제가 안전규칙 준수보다 더 효과적인 건설재해 해결책일 것이다.

관점 전환를 시작으로 법규를 포함한 산업안전 분야 전체의 환골탈태가 진행되길 바란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없었더라면 산업재해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