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흔들리는 '안전자산' 지위
자원빈국, 경상수지 적자 심화가 배경 … 우크라사태 서방 돌격대 자처, 경제 멍들어
정치권, 한국 정권교체 반색
전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에서 '군사안보'보다 '경제'에 국가의 모든 자원을 쏟아부으면서 만들어진 엔화의 위상이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경제침체에도 버티던 엔화의 추락은 중국과 위안화의 부상과 대비되면서 일본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실물·금융 흔들리면 엔화부터 찾았는데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0일 '위험회피를 위한 엔화 수요'라는 기사에서 국제 금융시장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물경제나 금융시장의 위험도가 높아질 조짐을 보이면 위험성이 높은 금융상품에서 안전한 금융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하는데, 과거 일본 엔화가 피난처로 각광 받으며 엔화 수요가 증가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경제적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인데도 엔화에 대한 수요는 크게 떨어지고 있다. 대신 중국 위안화 등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에너지가격 급등으로 일본의 경상수지 적자 폭이 확대되는 상황이 있다. 상대적인 안전통화로서 엔화의 매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이후 엔화의 대달러 환율은 8일 현재 0.1% 하락했다. 한국 등 신흥국 통화가 국제정세에 따라 크게 흔들리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과거 흐름과는 딴판이어서 일본 언론이 주목하고 있다. 언론들은 장기적으로 엔화의 추세적 위상 추락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예컨대 2008년 리먼사태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엔화는 2008년 8월 1달러당 110엔대에서 같은해 12월 80엔대까지 치솟았다.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도 1달러당 75엔까지 상승해 전후 최고 가치를 보였다. 엔화가 이처럼 안전자산으로 평가받고 국제적인 위기시에 강세를 보였던 이유는 막강한 제조업을 배경으로 천문학적인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흑자를 내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 관계자는 "과거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지는 '위험회피' 국면에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가 엔화 시세를 자동적으로 밀어올리는 경향이 있었다"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자력 발전이 중단되고 화석연료의 수입이 급증하는 등 경상수지 적자로 전환되면서 예전같은 위상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재무성이 지난 8일 발표한 1월 국제수지현황(속보치)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 1월 1조1887억엔(약 12조6000억원)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두달 연속 적자다. 적자규모도 1985년 이후 두번째로 컸다. 이처럼 경상수지 적자가 커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원유가격 급등이다. 더구나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자원을 전적으로 수입하는 일본의 국제수지가 크게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이와증권 관계자는 "자원을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하는 일본은 향후 3~4년간 무역수지 적자 경향을 보일 수 있다"며 "무역수지의 큰 폭 적자가 계속되면 해외 배당이나 이자 등의 소득수지 흑자로도 이를 메우지 못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고착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가 폭등에 정계개편 조짐까지 나와
과거 같으면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의 고조는 달러나 엔화를 매입하는 호기로 작용했다. 다른 나라 통화로 갖고 있던 자산을 엔화 자산으로 돌리는 이른바 '리페이트리에이션'(repatriation)과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다른 나라 통화에 투자하는 투기적인 '엔케리 트레이드' 등도 엔화 수요의 급증을 불렀다.
동일본 대지진 때는 일본의 손해보험사들이 외화자산의 일부를 엔으로 바꿔 보험금의 지급을 보충하는 방식도 엔화 수요를 자극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측면에서의 엔화 수요도 떨어지고 있다. 한 시장 분석가는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주요 국가의 정책금리가 아직 제로 수준에 머물러 있고 엔캐리 거래의 움직임도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로 미국과 유럽중앙은행(ECB) 등이 사실상 제로금리 정책을 펼치면서 엔화를 이용한 투기적 수요가 떨어진 것이다.
미즈호은행 관계자는 "과거 최대 규모였던 2014년의 경상수지 적자 때와는 자원 가격 급등의 차원이 다르다"며 "밀가루 등을 포함해 상품가격 전반이 상승하고, 경상수지 적자도 고착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엔저가 엔저를 부르는 악순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원유 가격 급등에 따른 일본 내 유류가격 인상은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국회의원 10석 안팎의 국민민주당이 휘발유값 보조금의 상향을 매개로 정부 예산안에 찬성한 것이 발단이 됐다. 다마키 국민민주당 대표가 기시다 총리와 만남에서 급등하는 휘발유 가격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합의하고 예산안 통과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논란이다.
일본 야당은 전통적으로 정부여당의 예산안에 대해 수십년간 반대표를 행사함으로서 내각책임제하에서 책임정치를 지켜나가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파문이 컸다. 일본 정계는 최근 기존 자민-공명 연립에 국민당이 가세하는 정계개편 가능성까지 나온다.
이와 관련 경제산업성은 9일 휘발유 가격의 상승을 막기 위해 1리터당 5엔이던 보조금을 17.7엔으로 상향한다고 발표했다. 에너지청에 따르면 가솔린가격은 1리터 174.6엔으로 전주보다 1.8엔 올랐고 9주 연속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일본의 유류가격은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일본, 윤석열 당선에 기대감 드러내
한편 일본 정치권은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을 내심 반기고 있다. 역대 최악인 한일관계 개선에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10일 기자들과 만나 윤 당선인과 관련 "당선을 환영한다. 진심으로 축하 말씀을 드리고 싶다"면서 "세계 평화와 안정에는 건전한 한일관계가 불가결하다. 윤 당선인의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고 관계 개선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윤 당선인과 전화회담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쌓아온 한일 우호협력 관계를 기반으로 양국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본 정치권이 윤 당선인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데는 문재인정부 내내 양국관계 악화의 원인이 한국정부에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윤 당선인은 선거운동 기간을 비롯해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적극 드러냈다.
하지만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까지는 험난할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아사히신문은 10일 한일관계 개선의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면서 역사인식에 간극이 있다고 했다. 이 신문은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을 명령하고, 이에 따른 후속 가압류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정부 관계자는 신문과 인터뷰에서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현금화가 진행되면 두나라 관계는 파국적으로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특히 아사히신문은 일본 내 정치일정도 양국 관계 정상화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오는 7월로 예상되는 일본 참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집권 자민당이 한국과 대치 국면을 형성하는 것이 득표전략에 나쁘지 않다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
니시노 준야 게이오대학 교수는 "윤 당선인은 한일관계 현안을 포괄적으로 해결하자는 방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한일 양국정부가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윤 당선인이 말하는 포괄적 해결방안은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니시노 교수는 그러면서 "한국내에서 대일본 대책을 두고 (진보와 보수가) 분열돼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일본측이 보다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양국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