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러시아 원자재 없어도 괜찮을까

2022-03-14 11:37:42 게재

이코노미스트지 "높은 원자재 가격 오래 지속 … 석유수입국 경상수지 대폭 하락 전망"

러시아는 세계 11위 경제국에 불과하지만 원자재를 매개로 세계경제와 깊은 의존성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와 석유, 석탄과 관련해 각각 전세계 1, 2, 3위다. 특히 유럽은 러시아 에너지에 깊이 관련돼 있다. 미국 역시 우라늄 수요의 절반을 러시아에서 충당한다. 러시아는 전세계 알루미늄과 구리 1/10을, 배터리에 쓰이는 니켈의 1/5을 공급한다. 자동차·전자산업의 핵심소재인 팔라듐 등 값비싼 광물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은 더 크다. 밀과 비료의 주요 공급국이기도 하다.

때문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는 포괄적인 대러 금수조치를 가했지만 원자재 관련 수출은 예외로 뒀다. 그러던 미국이 8일(현지시각) 러시아 원유 엠바고를 선언했다. 미국의 러시아 원유 비중은 미미하다. 영국 역시 올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줄일 계획이다.

서구가 러시아에 대해 추가적인 제재를 단행할 수 있다는 신호가 감지되자 원자재 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미국 국무장관 토니 블링컨은 6일 동맹국들과 대러 금수조치를 의논할 것이라고 말하자 브렌트산 원유 가격은 배럴당 139달러로 치솟았다. 지난해 12월 1일 가격의 두배였다.

가스 가격 출렁임도 컸다. 지난 8일 유럽 가스 가격은 메가와트시당 316달러로 1/3 급등했다. 러시아가 서구의 경제제재에 보복할 것이라 말하면서다. 1년 전과 비교하면 18배 높아졌다. 같은 날 런던금속거래소는 145년 역사상 처음으로 니켈 거래를 중단했다. 니켈 가격이 이전 최고가 대비 2배 상승했기 때문이다. 다른 금속들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거나 그에 육박했다.

원자재 시장의 충격은 깊이와 넓이 측면에서 전례 없는 일이다. 톰슨 로이터가 집계하는 3개월 기준의 핵심원자재지수는 1973년 이래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 문제는 시장의 발작이 아직 실물경제로 넘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자재 시장의 한 트레이더는 "지금의 가격들은 스크린상에서 요동치지만, 4주 뒤 현실로 넘어온다"고 말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에서 "만약 원자재 수급이 계속 차질을 빚는다면, 에너지와 주요 금속은 배급돼야 할 것"이라며 "민간기업과 개인들의 삶은 고통스럽게 이에 적응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원자재 시장의 공포를 두가지 이유로 분석했다. 첫째, 원자재 수급이 우크라이나전쟁 이전에도 원활치 않았다는 점이다. 각국이 코로나19 봉쇄를 끝내고 경제를 재개방하면서 에너지와 금속 수요가 치솟았다. 재고량은 사상 최저치로 낮아졌다. 글로벌 원유거래기업 '비톨'의 리서치 부문장인 지오바니 세리오는 "공급량을 줄이기는 쉬워도 늘리기는 어렵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원자재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유정제공장처럼 코로나19 팬데믹에 문을 닫은 많은 미드스트림 시설들이 여전히 가동 중단 상태다.

공포감의 두번째 이유는 공급원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는 여전히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수백만배럴의 러시아산 원유가 현재도 대서양을 건너가고 있다. 러시아산 원유 대부분이 2주 전 또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계약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격이 25% 급락한 러시아 우랄산 원유의 신규 공급은 대부분 중단됐다. 서구 기업들이 예상 가능한 대러 제재를 선제적으로 시행하고 있어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자금조달 부문이다. 대부분 외국은행들, 심지어 중국은행들까지 러시아 무역에 대한 신용장 개설을 중단했다. 지난 10년 동안 이란 등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위반한 이유로 주요 은행들이 막대한 벌금을 낸 바 있다. 이젠 주요 글로벌 은행들은 그같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글렌코어와 같은 글로벌 원자재 거래기업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었다.

물류 문제 역시 심각하다. 외국 선박들은 보험을 들기 어렵다는 이유로 흑해 항로를 피한다. 러시아 컨테이너 화물운송의 1/3을 차지하는 머스크와 MSC는 지난주 러시아 운항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철강과 대두를 실은 러시아 선박을 나포했다.

러시아와 전세계를 오가는 화물의 발이 묶이고 관련 상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원자재 거래의 물리적, 금융적 인프라가 큰 압박을 받고 있다. 일부 유럽 항구는 심각한 물류정체를 빚고 있다. 러시아에 투자한 일부 거래자들은 거대한 액수의 마진콜에 직면했다. 지난 7일 중국건설은행은 런던금속거래소 지급기일을 넘기기도 했다. 선박용 연료유 가격은 러시아 침공 이후 1/3 올랐다.

만약 서구가 러시아산 원유 엠바고를 전격 시행한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전쟁 전 러시아는 하루 700만~800만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그중 절반은 EU로 간다. 이론적으로 중국이 러시아산 원유를 보다 많이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컨설팅기업 '라이스타드 에너지'는 러시아가 송유관으로 유럽에 보내는 원유 중 단 50만배럴만 아시아로 돌릴 수 있다고 추산한다. 거기에 철도를 통해 추가적으로 20만배럴을 아시아로 보낼 수 있다. 러시아산 원유를 선박에 실어 유럽으로 옮기는 데 5~10일 걸린다. 반면 아시아 수송은 45일 걸린다.

비서구 기업들에게까지 '세컨더리 보이콧'(러시아와 거래하는 제3국에 대한 금융제재)이 이뤄진다면 러시아산 원유는 갈곳을 잃게 된다. 서구 지급결제 시스템에서 배제되기에 물물교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주도하는 대안 거래시스템 역시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는 러시아의 원유 공급량 상당몫이 시장에서 퇴출된다는 의미"라며 "러시아가 원유 엠바고에 대응하겠다고 천명하면서 가스와 석탄 등의 원자재들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유럽의 석탄 수입 중 러시아 비중은 지난 10년 동안 2배 늘어 80%에 달하는 상황이다.

가장 큰 의문은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을 다른 곳에서 만회할 수 있느냐다. 원유의 경우 미국은 하루 100만배럴 원유 증산을 예고했다. 또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압박해 공급을 늘릴 수도 있다. 여기서 약 200만배럴이 늘어날 수 있다. 이란에 대한 제재 해제도 약 100만배럴을 추가할 수 있다. 전략비축유도 방안 중 하나다. 미국과 기타 석유소비국들은 지난주 약 6000만배럴의 전략비축유를 풀기로 합의했다.

이를 합하면 글로벌 원유 공급량을 하루 300만~400만배럴 늘릴 수 있다. 하지만 충분치 않다. 그리고 추가공급이 현실화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OPEC 회원국들은 생산량을 신속히 늘릴 수 없다. 지난 수년 동안 새로운 유전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다. 미국 셰일석유 업계 역시 새로운 광구를 다시 찾는 데 약 6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찾는다 해도 원유를 뽑아올리기까지는 또 다른 6개월이 필요하다. 그러는 동안 국제유가는 나날이 고공행진을 할 전망이다.

유럽으로선 가스공급원을 새로 찾는 게 시급하다. 날이 풀리면서 유럽의 가스 수요는 줄어들 전망이다. 겨울철 이후 재고확충은 가을까지 미뤄질 것이다. 유럽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를 대거 수입할 계획이다. 그러려면 LNG를 가스 상태로 전환하는 '재기화'(regasification) 시설을 대폭 늘려야 한다.

노르웨이 가스전의 여름철 정비기간도 미뤄질 수 있다. 가스를 계속 생산하기 위해서다. 주요 가스 생산국인 아제르바이잔도 보다 많은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다. 라이스타드 에너지는 "이를 모두 합하면 러시아산 가스수입 분량의 약 60%를 대체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필사의 노력이지만, 여전히 불충분하다"며 "따라서 원자재 수요의 강제적인 감축 없이는 시장의 재균형 작업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강제적인 감축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소비제한 정책이 있다. 건물 난방시간에 제한을 두거나 산업용 전기를 배급하는 등의 정책이다. 또 '수요 파괴'를 통한 자진 감축도 있다. 비톨의 세리오 리서치 부문장은 "원유가격이 배럴당 200달러로 치솟으면 200만배럴이 자연적으로 감축될 것이고, 사람들의 소득이 줄어들면서 또 다른 200만배럴이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라이스타드 에너지는 지난 9일 "보다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러시아 원유 엠바고에 참여한다면 국제유가는 올해 여름 배럴당 240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초고유가 시대가 현실화하면 기업과 가계는 엄청난 피해에 직면한다. 금속 등에서도 수요 파괴가 일어나면 피해는 더 커진다. 알루미늄 부족으로 자동차부터 음료수캔까지 제조가 어려워진다. 니켈이 부족해 전기차 생산량이 줄어들 수 있다.

JP모간체이스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올해 전세계 경제성장률은 0.8%p 줄어들 것"이라며 "유로존은 2.1%p 하락이라는 충격을 입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제유가 상승에 가난한 국가들은 경상수지 적자 늪에 빠질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배럴당 150달러의 국제유가가 1년간 지속될 경우 37개 석유수입국들의 GDP 대비 경상수지는 평균 2.3%p 하락한다"고 분석했다.

고유가가 지속되면 파키스탄 터키 등 이미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국가들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중국 경상수지 흑자폭은 1%p 넘게 하락할 전망이다. 칠레 등 원자재 수출국도 예외가 아니다. 금속가격은 원유 상승분만큼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석유수출국들은 이득을 보겠지만 통화가치 상승으로 비에너지 수출이 어려워질 수 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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