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물가 잡으려면 무역장벽 허물어야"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경쟁 있어야 인플레이션 낮아져 … 정부·납세자 연간 1000억달러 혜택"
취임 1년 반이 다가오지만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여전히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설정한 경제전쟁과 씨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언행은 전임자보다 덜 극단적이면서 더 정중하다. 하지만 여전히 전임자의 무역 고립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철강과 알루미늄,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고율 관세와 엄격한 할당제를 지속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치솟는 환경에서 그같은 정책은 실질비용 상승을 초래한다. 철강 알루미늄 관세로 인한 가격상승은 소비자와 기업에 전가된다. 의류와 신발, 유제품 등 미국인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각종 상품의 가격이 덩달아 오른다.
유력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연구원 게리 허프바우어와 메건 호건, 일린 왕은 최근 포린어페어스 기고 '자유무역이 인플레이션에 대처할 수 있다'에서 "이런 부가적인 비용은 소설이 아니다. 실제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간다"며 "미국인과 기업이 겪는 고통은 정부 정책의 변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물론 경제 보호주의가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 급등의 주요인은 아니다"라고 인정하지만 "관세를 없애거나 줄이면 인플레이션을 끌어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PIIE 추산에 따르면 수입관세를 2%p 내리면 인플레이션을 1.3%p 낮출 수 있다. 이는 내년 미국 가계 평균 800달러 가까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고 우선순위는 물가를 잡는 것"이라고 말했다. PIIE 연구진들은 "그 말이 진심이라면 관세와 비관세장벽을 철폐하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부 바뀌었지만 보호주의 그대로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의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한발 더 나아갔다. 이른바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정책을 수립, 정부가 외국의 경쟁기업들에서 필요품을 조달하는 것을 막았다. 이를 애국주의라고 표현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의 기업이라 해도 미 정부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에게 달갑잖은 불청객이라는 이미지를 풍기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안무역법'(Jones Act) 효력을 중지하는 데도 실패했다. 미국 내 지역간 해상운송 권한을 얻으려면 △미국에 등록하고 △미국 국적 선원을 탑승시키고 △미국 시민 소유의 △미국에서 건조되거나 상당부분 개조된 선박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법이다. 한마디로 외국의 상선은 미국의 항구들을 오갈 수 없도록 한 법이다. 이는 주요 항구의 해상운송 병목현상을 악화시킨 요인이었다.
바이든정부의 보호주의 경향은 중국 정책에서도 여전하다. 미국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지난 5월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시대 대중국 관세 일부가 미국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키기는커녕 소비자와 기업에게 많은 피해를 끼친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미국 무역대표부 캐서린 타이 대표는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선 대중국 관세정책을 지속하는 게 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PIIE는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일부 정치인들의 고집"이라며 "공화당 상원의원 마르코 루비오와 조쉬 하울리 등은 중국과의 그 어떤 교역도 매국적이라고 본다"고 꼬집었다.
불행한 것은 트럼프와 달리 바이든의 보호주의 정책은 수십년래 가장 높은 인플레이션 시대와 맞물리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여파, 공급망의 지속적인 차질, 우크라이나 사태로 치솟는 에너지가격 등으로 상황은 악화일로다.
글로벌 비료 가격은 1년 전보다 2배 이상 올랐다. 지난해 역대 최고치로 오른 철강 가격은 더 상승할 조짐이다. 유럽 최대 규모의 우크라이나 아조우스탈 제철소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데다 주요 철강 수출국인 러시아는 서구의 제재 엠바고 대상이 됐다.
트럼프 정책을 이어받은 바이든정부의 철강 관세와 할당제는 인플레이션을 크게 부추길 전망이다. 자동차와 냉장고, 배관설비, 교량건설 등의 가격과 비용이 상승하고 있다. PIIE는 "미국 철강제조사들은 '관세 덕분에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가 유지된다'고 주장하지만 철강 노동자 1명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내 철강을 사서 쓰는 기업들이 추가로 내야 하는 비용은 65만달러에 달한다"며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캐나다 목재에 부과하는 관세 때문에 평균적으로 주택 1채를 지으려면 약 1만8600달러의 비용을 추가적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다. 2017~2021년 미국의 캐나다 목재 수입액은 59억달러에서 1억8500만달러로 급감했다. 이같은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무역자유화가 물가대처의 중심
보호주의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고려하면, 무역자유화가 인플레이션 대처의 중심축이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관세를 줄이고 수입할당제를 없애야 미국 기업과 가계가 구입하는 수입품의 가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더 저렴한 외국 상품이 수입되면 미국 내 경쟁하는 상품의 국내가격이 하방 압력을 받게 된다. 저소득 가계는 고소득 가계보다 버는 액수의 더 많은 비중을 소비한다. 관세를 줄이면 가장 취약한 미국 가계들이 훨씬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
PIIE는 "가장 중요한 건 관세를 인하하는 것"이라며 관세를 2%p 내리면 내년 인플레이션을 대략 1.3%p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철강과 알루미늄,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트럼프 시대 관세를 모두 철폐하고, 비료와 목재 같은 핵심 상품에 대한 관세를 긴급조치를 통해 감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바이든정부가 한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 아메리카 규제를 완화하고 최고 20%를 넘는 최혜국대우 관세 상한선을 10%로 낮출 경우 기존 무역장벽을 기존대로 유지한다고 해도 평균 관세 부담이 4.2%p 줄어들고 인플레이션은 2%p 낮출 수 있다고 PIIE는 추산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소비자들의 고통을 직접 줄이려면 유제품과 의류 신발 등 가계 지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수입상품에 대한 관세를 줄일 수도 있다. 이런 상품은 아마존과 월마트 등 주요 소매판매기업들에서 주력으로 미는 것들이고, 소비자들이 물가를 쉽게 체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가격 인하 효과가 대대적으로 홍보될 수 있다.
이와 별개로 바이든정부는 의회에 유아 이유식과 비료, 목재 등 대통령이 지정하는 특정 품목에 대한 관세를 18개월 보류할 권한을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물론 입법부인 의회는 행정부의 권한 확대에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평균 인플레이션이 18개월 내 3% 수준으로 하락할 경우 해당 권한이 자동 소멸토록 일몰 조건을 부과하거나, 의회가 필요시 대통령의 해당 권한을 중단시킬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한다면 큰 문제는 없다는 게 PIIE의 분석이다. PIIE는 "바이든 대통령이 그같은 정책을 성공시킨다면 미국 소비자들은 바이든정부의 인플레이션 대처에 신뢰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정학적 목표에도 도움
무역자유화는 인플레이션 대처를 넘어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에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의 급부상에 대처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와 '미국-EU 무역·기술위원회'(TTC) 등 국제적 이니셔티브를 내세웠다. 하지만 미국은 타국에 시장을 새로 내줄 생각은 없다. 대신 안보적 차원의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다.
PIIE는 "미국이 제시하는 이니셔티브에 동참하려는 국가들은 상징적인 안보 약속을 믿는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이미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국가들, 또는 중국의 팽창을 개의치 않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같은 국가들에겐 먹히지 않는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IPEF와 TTC는 기존 무역협정, 투자협정을 대체하긴 어렵다. 특히 트럼프정부가 임기 초반 폐기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후속판 CPTPP나 중국이 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들과 출범시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은 미국 없이도 추진력을 얻고 있다.
바이든정부는 타국들에 노동과 소수인권, 성평등, 환경보호, 정부부패 일소, 국영기업, 인공지능, 디지털규제 등에 대해 미국의 기준을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넣으면서도, 모호한 안보확약을 제외하곤 주는 게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같은 거래는 상대국 유권자들이 용인할 수 없는 수준이다. 현재 각국의 유권자들은 고담준론의 지정학보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가 발등의 불인 상황에 놓여 있다.
때문에 미국의 무역자유화 전환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바이든정부는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 할당량을 철폐하고 △바이 아메리카 규정을 완화해 정부 조달시장의 타국 접근성을 확대하고 △유제품과 의류, 신발 등의 관세를 낮추면서 해당 협약의 파트너 국가들에게 구체적인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결국 이는 상대 국가에 정치적 선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국이 주도하는 이니셔티브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강화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PIIE는 "물론 무역자유화는 내수기업, 특히 건설사와 방산기업들, 그리고 미국 노동자들의 반발을 부를 것"이라며 "하지만 무역자유화를 통한 물가 낮추기로 미국 정부와 납세자들은 연간 1000억달러로 추산되는 혜택을 입게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