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 사망
소련 해체, 동서독 통일 용인 냉전종식…보수파 쿠데타에 경제난으로 몰락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이날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 러시아 언론을 인용해 고르바초프의 사망 사실을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 끝에 이날 저녁 사망했다"고 밝혔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올해 초 모스크바 외곽의 전원주택인 다차(dacha)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54세 때인 1985년 일곱 번째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했다. 이후 6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에 이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티'(개방) 정책을 밀어붙이며 소련과 국제사회에 대변혁을 몰고 왔다.
언론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글라스노스티 정책으로 소련 국민은 생각한 바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시장경제 요소의 도입과 기업 활동의 자율화에 초점을 맞춘 페레스트로이카는 침체에 빠진 소련 경제에 상당 정도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페레스트로이카는 '신사고'에 바탕을 둔 외교 분야에서 가장 속도를 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집권 8개월 만인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화해의 악수를 함으로써 수십 년간 계속돼온 양국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초석을 놓았다. 이어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및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하는가 하면 동유럽 주둔 소련군 50만명을 일방적 감축하는 등 굵직한 군축 조치가 뒤따랐다.
미-소의 이같은 화해 분위기는 마침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독일 통일과 동구권 민주화의 촉매제가 됐다.
그는 또 1988년 5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을 철수하기 시작해 이듬해 2월까지 철군을 완료했다. 1989년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 데 이어 1990년 여름 동·서독의 통일을 수락했으며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잔류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냉전 해체와 독일 통일 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또 같은 해 한-소 수교라는 역사적 선물을 한국민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처럼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동구권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소련의 해체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동구권을 서방에 넘겨준 '배신자'라는 혹평도 받는다.
사회주의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려다 끝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 여름 급진적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해 개혁파 인사들과 틈이 벌어졌고, 1991년 8월엔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도중 보수파의 '3일 천하' 쿠데타로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개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악화일로를 걷던 경제 사정도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소련의 중앙권력이 약화하면서 민족갈등과 분리주의운동이 터져 나왔고 소련은 회복할 수 없는 붕괴의 길로 치달았다.
1991년 12월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한 데 뒤이어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한 소련 소속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해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소련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경직된 소련 사회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으려 했던 그는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개혁의 가속도에 떠밀려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