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 시행 8개월 지났지만
노동현장에서 목숨 잃는 현실 그대로
매일 한명 이상 꼴로 노동자 사망 … 시행령 개정 앞두고 정부·노조 갈등
중대재해처벌법이 올 1월말 시행에 들어간 후 9개월째로 접어들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노동자가 일하다 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지난 26일 현대 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화재 사고로 죽거나 크게 다친 8명은 모두 하청업체와 외부 용역업체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개점 전 준비를 위해 새벽부터 업무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 정확한 화재원인은 정부의 감식을 통해 규명되겠지만 화재가 발생한 주자창에 종이박스와 의류 등을 쌓아놓는 등 안전관리에 소홀했던 것이 대형 참사를 낳은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현대 아울렛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던 날 서울 서대문구에서는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작업하던 40대 노동자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이 노동자는 창틀 실리콘 작업을 준비하다 지상으로 떨어져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
사망사고는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27일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한 공장에서 60대 노동자가 난간 설치 작업을 하다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추락방지망 등 안전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8일에는 경북 포항 현대힘시 공장에서 일하던 하청업체 노동자가 크레인에서 떨어진 철판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중대재해사고 기소는 단 1건 =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는 303건, 사망한 노동자는 320명에 달한다. 매일 한 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재로 인해 사망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지난해 상반기(334건, 340명)와 비교하면 사망사고는 9.1%, 사망자는 5.9% 줄었지만 당초 기대에는 크게 못 미친다.
사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될 때부터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적지 않았다. 중대재해가 많이 발생하는 소규모 사업장이 제외된 탓이다.
올 상반기 사망사고 가운데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건수는 197건으로 65%를 차지했다. 사망자 수도 200명으로 전체의 62.5%에 달했다.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상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은 적용대상에서 제외됐고, 5~49인 사업장은 2024년부터로 적용 시점이 늦춰졌다.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이달 초까지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된 재해 사고는 141건으로 이틀에 한번 꼴로 발생했다. 2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자가 나왔다. 하지만 이 가운데 기소돼 재판에 넘어간 것은 단 한건에 불과하다.
◆정부, 규제완화에 노조 "법 무력화" 반발 = 그럼에도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면서 되레 기업의 안전보건관리 책임을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정부의 예산권을 쥐고 경제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기획재정부는 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를 둘 경우 대표이사의 책임을 면제하고, 안전·보건 인증으로 사업주의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중대재해처벌법상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지난 27일 제주도 열린 '2022 중소기업 리더스포럼'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너무 급하게 만들어 규정도 모호하고 준수하기도 어렵다"며 "경영자와 근로자 모두 합리적으로 법을 이행할 수 있도록 경영책임자 의무를 명확히 하는 등 시행령을 합리적인 방향으로 손보겠다"고 했다. 중대재해처벌법상 기업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시행령을 개정할 방침을 시사한 것이다.
다음달 중순 경 시행령 개정을 앞두고 노동계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다.
전국금속노조 서울지부는 29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시행령 개정 중단을 촉구했다. 노조는 "윤석열정부가 시행령을 변경해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를 무력화시키려하고 있다"며 "정부가 시행령 개정을 추진할 경우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발생한 사고 대부분은 노동자의 부주의가 아닌 기업의 안전보건조치 미이행에 따른 것"이라며 "지금은 법을 바꾸기보다 엄정한 법 집행과 기업의 산재예방활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치권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다. 김영주 국회부의장은 28일 긴급간담회를 갖고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사고 예방 효과를 기대했는데 아직 작동하지도 않는 듯싶다"며 "그런 시기에 완화해서 시행령으로 바꾸려는 건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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