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② 한옥(韓屋)에 개설한 미국공사관
미국의 공사 파견과 한반도에 대한 관심
오늘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이후 조미조약)이 체결된 지 141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은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조약을 체결하며 서양 국가와 최초로 공식 외교관계를 맺는다. 조미조약 제2조 '공사급 외교관 파견과 영사관 설치' 조항에 따라 미국은 초대 특명전권공사로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를 파견한다. 1883년부터 1905년 11월 에드윈 모건(Edwin V. Morgan) 공사를 마지막으로 국교를 단절하기까지 약 22년 동안 변리공사와 임시대리공사를 포함해 총 11명이 공사로 근무하며 조선말(대한제국) 한반도의 외교사적 소용돌이와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조선은 '자주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청국의 압력으로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지 못하다가 1888년 1월에서야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주미조선(대한제국)공사관을 개설한다. 미국의 지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정지당할 때까지 약 17년 동안 운영한다.
미국공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까지 미국영사관으로 운영됐다. 1945년 8월 광복을 거쳐 1949년 1월이 돼서야 비로소 양국은 국교를 대사급으로 재개한다. 한국은 장면(張勉)을, 미국은 존 무쵸(John J. Muccio)를 초대 대사로 파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은 조선에 개설한 미국공사관을 통해 청과 일본, 러시아 등 주변 열강 가운데 어느 국가가 조선 정부에 우위권을 가지느냐에 관심을 뒀다. 1894년 청일전쟁 이전에는 청의 우위가, 그 이후 1904년 러일전쟁까지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지속됐다. 미국 공사들은 한반도에서 동등한 무역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대한제국)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 권익독점을 꾀하는 열강에 대해 적대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다. 즉, 청일전쟁 이전에는 서구문물 도입을 봉쇄한 청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과 러시아를 미국 국익의 걸림돌로 간주했다.
서양이 개설한 최초의 공사관
1882년 5월 22일 양국 간에 체결한 조미조약은 같은 해 7월 29일 미국 상원에 제출되어 1883년 1월 9일 비준된다. 미국은 조선에 상설 재외공관 설치를 추진하면서 1883년 2월 27일자로 초대 미국 공사에 캘리포니아주판사, 주칠레영사, 주콜롬비아영사를 역임한 푸트를 임명한다. 그는 국무부 명령에 따라 1883년 4월 일본 요코하마에 약 한달 간 머물면서 부임 준비를 하다가 제물포에 도착해 5월 19일 서울에서 독판교섭통상사무(외부대신) 민영목과 조약 비준서를 교환한다.
푸트 공사는 박동(옛 숙명여고 터)에 소재한 청 외교고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집에서 집무를 하면서 통역관 윤치호 등에게 새 공사관 부지를 알아보게 했다. 조선정부는 6월 초 푸트에게 경운궁 서쪽 경내, 정동에 위치한 명성황후의 일가 정5품 한림학사 민계호와 아들 민영교의 집을 알선한다. 민계호(閔啓鎬, 이조판서 민치상의 아들)의 집은 건물 125칸과 빈터(空垈) 300칸, 민영교의 집은 건물 140칸 빈터(空垈) 150칸 규모였다. 이외에도 주변 가옥을 몇 채 더 매입해 미국공사관을 조성한다.
정동에 개설한 미국공사관은 서양이 개설한 최초의 재외공관이다. 하지만 푸트의 관점에서는 "지리적으로 약간 경사가 져서" 만족스럽지는 못했던 것 같다. 1884년 해군 무관으로 미국 공사관에 부임했던 포크(George C. Foulk)는 "공사관은 울타리가 긴 주택이며 그 안에 8개의 분리된 집이 있었다"라고 묘사한다.
당시 공사관 부지와 건물 매입 금액은 2200달러였는데, 미국정부가 비용을 줄 것으로 예상하고 먼저 푸트가 개인 돈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4년이 지나도록 미국 의회는 예산을 책정하지 않았다. 결국 1887년까지 미국공사관 건물은 푸트 공사 개인 소유였고, 미국정부가 그에게 대여료를 지급하는 형태로 유지됐다. 미국 의회는 1886년 7월 1일 미 공사관 건물 구입을 승인했고 실제 구입은 1887년 9월에 이뤄진다.
미국공사관은 다른 나라 공사관들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공식 외교관계가 시작된 후 단교할 때까지 조선 전통 한옥 형태로 같은 자리에서 운영한다. 당시 영국 일본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의 공사관은 구입한 한옥을 서양식 건물로 신축한 반면, 미국공사관은 한옥의 내부 공간만 개조해 그 건물을 계속 사용했다. 미국 공사들은 본국에 여러차례 공사관 신축을 요청했지만 관련 예산을 지급받지 못했다.
푸트는 '천장이 낮아 모자가 닿는다'는 이유를 들어 본국 정부에 서양식 건물을 신축할 비용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 국무장관은 '조선에서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지 않는 것이 조선 풍습으로 안다'며 거절했다. 이런 사정으로 공사관 내외부를 수리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큰 건물 한 채는 공사관으로, 다른 한 채는 공사관저로 사용했다.
렌즈를 통해 본 미국공사관 내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박동의 서남쪽, 경운궁 주변으로 영국과 미국 공사관이 개설되었고 1885년 10월 해관본부가 이전했다. 미국 개신교도들도 그 일대를 중심으로 터전을 잡았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장기간 공사를 역임한 알렌(Horace N. Allen)이 저술한 '조선견문기'(Things Korean, 1908)에는 공사관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여러해 동안 우리들의 평안한 가정이었던 미국공사관의 주택 지역은 35에이커(acre)이며, 이 주택은 순전히 한식 가옥들이다. 우리는 집안 장식을 서구풍으로 고치고 잔디를 심기 위해 몇 채의 건물들을 옮겨 다른 가옥들과 합쳐야 했다. 조선의 재래식 건물은 가능한 한 예술에 취미가 있는 방문객들의 즐거움을 자아내려고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대들보와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깨끗한 백지로 덮여 있는 천장의 미를 좋아한다."
알렌이 언급한 대로 미국공사관은 '예술적 취미'가 있는 이들을 위해 한옥의 원형을 보존하고자 했는데 일부에서는 '공사관 건물이 매우 낡고 오래돼 인근의 다른 나라 공사관 건물에 비해 초라해 미국인들이 수치스러워한다'는 상반된 반응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 공사들은 공사관 신축을 요청했고 씰(John M. B. Sill)의 재임 시에는 신축계획도 세웠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미국공사관의 내부 사진(사진 오른쪽)은 1904년 무렵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양한 가구를 갖춘 내부를 상세히 보여준다. 여기에는 푸트 여사가 특히 아꼈다는 대들보와 서까래가 노출된 한옥의 구조에 격자 형식의 전통 조선식 문이 보이고 서양식 건축물에서만 볼 수 있는 벽난로가 각 공간에 설치됐다. 거실의 벽난로 프레임에는 뇌문 문양(fret)을 넣어 동일한 무늬의 카펫 가장자리와 조화를 꾀했다. 여기에 서양식의 소파와 의자, 테이블을 놓았고 삼층장과 같은 조선식 가구도 함께 배치해 한양 절충을 이루고 있다.
■참고자료
손정숙,「한국근대주한민국공사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한겨레21,「전우용의 서울탐史 945호 정동 하비브하우스가 한옥으로 남은 이유」, 2020.5.
이덕주,「'근대화의 요람' 정동이야기(1)」,『기독교사상』458, 40-2, 대한기독교서회, 1997.
최지혜,「한국 근대전환기 실내공간과 서양 가구에 대한 고찰」,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6.
H.N. 알렌,『조선견문기』, 박영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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