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③ 대미 사절단 보빙사(報聘使) 파견의 의미
자주독립국가·개화에 대한 열망 드러내
1882년 5월 조미조약 체결 이듬해인 1883년, 미국은 서울 정동에 푸트(L. H. Foote)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해 상주 공사관을 개설하고 외교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조선은 재정적인 문제와 중국(청)의 간섭 등으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 공사관을 개설할 수 없었다. 조선은 푸트 공사의 권고도 있고 공사관을 개설해 준 감사의 의미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한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각지를 돌며 주요 공업시설과 농업시설 언론사 육군사관학교 미국의 정부 부처 등을 시찰하며 견문을 넓힌다. 이번 글에서는 보빙사가 방문한 여러 도시와 주요 정부기관을 소개하기보다는 조미수교 이후 보빙사 파견이 갖는 자주독립 및 외교의 상징적인 내용 몇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선진문물 직접 보고 개화정책 추진 의도
조미조약 제2조 '공사급 외교관 파견과 영사관 설치' 조항에 따라 미국은 1883년 미국공사관을 개설·운영했으나, 조선은 본의 아니게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할 수 없어 상호주의 원칙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대안으로 찾은 것이 보빙사다. 조선에 공사관을 개설한 미국에 답례의 뜻으로 파견한 외교사절단이자 견미사절단(見美使節團)을 보낸다.
한편 조선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일본에 수신사를 4차례 파견했는데, 제1차 수신사(1876년), 제2차 수신사(1880), 제3차 수신사(1881), 제4차 수신사(1882) 등이 있다.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는 '일본과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터이 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을 의미하지만, 보빙사는 외교적 답례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조선정부의 보빙사 파견은 크게 세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중국(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다. 둘째, 미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보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셋째, 고문관 군사교관 교사 등을 초빙해 정치·군사·교육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한편 차관을 도입해 경제개발을 추진하고자 했다.
보빙사 파견이 결정되자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은 고종에게 여흥민씨 친족 세력의 주요 인물인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으로 추천해 중국(청)으로부터 자주독립과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
조선정부는 보빙사 전권대신에 민영익, 부대신에 홍영식(洪英植), 종사관에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에 유길준(兪吉濬) 변수(邊燧) 고영철(高永喆) 현흥택(玄興澤) 최경석(崔景錫) 그리고 미국인 로웰(P. Lowell), 청국인 우리탕(吳禮堂) 등 외국인 2명을 포함해 모두 10명으로 구성한다. 푸트 공사는 조미조약 체결 직후 처음으로 미국으로 파견되는 보빙사라 사절단을 안전하게 안내할 인물로 주일 미국공사 빙햄(J. A. Bingham)에게 로엘을 추천받는다. 로웰은 그의 개인비서로 일본인 미야오카(宮岡恒次郞)가 동행한다.
1883년 7월 16일 미국 해군함정 모노카시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출발, 일본에서 로웰과 합류해 아라빅호를 타고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여기서 대륙횡단철도로 이동해 9월 12일 시카고에 도착한다. 시카고에서는 남북전쟁의 명장 세리던(P. H. Sheridan) 장군이 영접했는데, 이 자리에서 미국 군사고문관 조선 파견 문제가 처음으로 거론된다.
아서 대통령에게 고종의 국서 봉정
9월 15일 보빙사 일행은 워싱턴DC에 도착했으나 당시 아서(C. A. Arthur) 대통령이 뉴욕에 머물고 있어 데이비스(Davis) 국무부 차관의 안내로 뉴욕으로 향한다. 9월 18일 뉴욕 피브스 애비뉴 호텔(Fifth Avenue Hotel) 대접견실에서 국서 제정식이 거행된다. 보빙사 일행은 사모관대를 갖춰 입고 호텔 대접견실에 들어가서 문밖에서 이마에 손을 얹고 큰절을 한다. 국가원수에 대한 최고의 예를 행한 것이다.
아서 대통령은 이례적인 예절에 몹시 당황하면서 허리를 굽혀 답례하고 서로 악수하면서 간단한 인사를 했다. 아서 대통령, 프릴링하이젠(F. T. Frelinghuysen) 국무장관 등이 도열한 가운데 국서 제정식은 엄숙하게 거행된다.
대조선국 대군주 고종은 아서 대통령에게 보낸 회한(回翰)에서 미국과 우의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다고 치하한다. 주목할 점은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한 다음날 '뉴욕헤럴드(New York Herald)'(1883.9.19.)에 한글 국서가 미국 신문에 최초로 보도됨으로써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는 '대조선국 대군주 한글 국서' 내용이다.
대조선국 대군주는 대미국 백리새천덕(大美國 伯理璽天德, President)께 글월을 올립니다. 이사이 두 나라이 조약을 바꾸고 화의(和誼)가 도타움에 전권대신 민영익과 부대신 홍영식을 흠차(欽差·파견)하여 귀국에 보내서 폐백(幣帛) 갚는 예(禮)를 닦이노니 이 대신들이 공번(公反·공평)되며 충성하며 주밀(周密)하며 자세하여 능히 나의 속마음을 몸 받아 고달(告達·알릴)할 터이며 범사(凡事·모든 일)의 변리(辨理·처리)함이 적당하리니 다행히 바라노니 정성을 미루어 서로 믿어서 더욱 화목케 하며 한가지 태평을 누리게 하시옵나이다. 생각하건대 또한 귀 백리새천?Z(대통령)도 기꺼워하실 바로소이다.
- 개국 사백구십이년 유월 십이일
위 국서의 내용을 통해 몇가지 주목할 부분은 조선 개국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외교문서에는 중국연호를 사용했으나 미국 대통령에 봉정하는 국서에는 조선의 개국연도 - 1392년 개국한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독립 및 외교의 의지를 보여준다. 또, 아서 대통령에게 봉정한 국서 원본은 한문본이지만, 보빙사는 한글본 국서를 별도로 제정해 사진 도판으로 미국 신문 '뉴욕 헤럴드'에 보도함으로써 세계 각국에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문자를 가지고 있는 문화국가임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태극기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미국 신문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1883. 9. 27)에 보인다.
"아더호(대통령 전용선) 마스트 위에 펄럭이고 있는 그들(조선)의 깃발에는 나침반 같은 모양의 방위를 가리키는 부호, 즉 4괘가 네 귀퉁이에 그려져 있었고, 중앙에는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 같이 생긴 도안, 즉 태극양의(太極兩儀)가 있는데 이는 조선의 행복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다."
이처럼 태극기는 신비로운 철학적 의미가 있는 국기로 보도하고 있다. 조선이 태극기를 국기제정 반포(1883. 3. 6)한 후 처음으로 미국 공식 외교 행사에서 태극기를 미국 대통령 전용선에 게양했다는 것은 세계만방에 조선의 자주의식과 독립정신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작지 않다.
■ 참고자료
로웰천문대 피트남박물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자주외교와 한미우호의 요람 주미대한제국공사관』(2019.10.)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1883. 9. 29.)
『New York Herald 』(1883, 9. 19, )
『New York Times』(1883. 9. 27)
김원모, 『상투쟁이 견미사절 한글국서 제정 上』(201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