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⑤ 비운의 개혁가 홍영식(洪英植)

한국인 최초의 '미국견문록'을 남기다

2023-07-07 11:27:20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미국 사절단 보빙사 10명은 전권대신 민영익을 중심으로 서광범 변수, 해군무관 포크(G. C. Foulk) 등이 대서양과 수에즈운하를 거쳐 인도양을 횡단하는 경로로 세계일주하고 1884년 6월 고종에게 복명(復命, 국왕의 명을 받고 일을 수행한 후 결과를 보고)한다. 한편 부대신 홍영식은 고영철 최경석 현흥택, 미국인 외교 서기관 로웰, 중국인 우리탕 등과 미국으로 왔던 경로를 되짚어 1883년 12월 21일 귀국하고 고종에게 복명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초의 미국 방문과 세계일주 기록은 1884년 6월 2일(음력 5월 9일)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전권대신 민영익이 종사관 서광범과 함께 고종에게 복명했다는 '승정원일기'에만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로부터 6개월 후 보빙사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 등이 가담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가족들은 노륙지전(남편 또는 아버지의 죄로 처자를 죽이는 형벌)을, 그의 아버지 홍순목(洪淳穆)은 자결했고, 형 홍만식(洪萬植)은 삭탈관직을 당한다. 반면 서광범 변수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 및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결국 대역부도죄인(大逆不道罪人) 홍영식의 복명 기록과 서광범 변수가 기록한 내용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그들이 1883~1884년 미국과 유럽 등 각국에서 보고 들은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보빙사 전권부대신 홍영식(1883년, 미국스미스소니언 소장)

1884년 당시 30세의 홍영식은 미국에서 보고 느낀 선진문물과 정치적 개혁을 통해 개화운동을 벌이려 했지만 갑신정변 실패로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보빙사 외교 서기관 로웰은 홍영식에 대해 "나에게 너무나 충실한 친절을 베풀었던 홍영식은 진정한 애국자였건만, 마침내 정치적으로 희생, 순국자가 되었으니 다만 그동안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고 회고한다.

1883년 12월 보빙사 부대신으로 귀국한 홍영식이 고종에게 복명한 기록인 '복명문답기'(復命問答記)가 1981년 2월 13일 청계천 고서점에서 단국대 김원모 교수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 보빙사 전권대신 민영익이 1884년 6월 고종에게 복명한 기록과 같이 홍영식의 복명 기록 또한 '승정원일기'에 기록돼야 할 중요 공문서였지만 역적의 문서를 등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홍영식의 글은 제외돼 내용을 알 수 없었는데 조미조약 약 100년 만에 발견된 것이었다.

필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최초로 미국과 유럽 등을 여행한 기록을 전권대신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 등이 일기나 견문기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되지 않으나 홍영식만은 미국견문기인 복명문답기를 남긴 것이다. 아니 어딘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는 홍영식의 '복명문답기'가 최초의 '미국견문기'인 셈이다. 이후 1888년 주미조선공사관에 부임한 박정양 초대 공사가 저술한 '미행일기'(美行日記),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 등을 미국 견문록으로 포함할 수 있다.

홍영식의 '복명문답기'(1883)


홍영식의 '복명문답기'는 한자로만 쓰여졌고 길이는 278.5㎝, 폭이 20.7㎝, 총 149행 1행당 20자 내외로 총 2887자에 이른다. 글자는 초서(草書)와 행서(行書)의 혼체필사본으로 지질은 얇은 태지(胎紙)로 두루마리식으로 이어져 있다.

'복명문답기'의 첫머리에는 '계미십일월이십이일전권부대신홍영식'(癸未十一月二十二日全權副大臣洪英植)이라고 정확한 연도와 월일, 작성자 이름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는 교육 우편 군사제도 등에 역점을 두고 근대화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국의 선진문물을 도입·수용할 것을 강조한다. 주요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 등이 그곳에 도착한 이래 언어가 불통하고 문자가 같지 아니해서 눈과 귀(耳目)로 보고 들어서 파악할 수는 있어도 도무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기(器機)의 제조 및 배·차·우편·전보 등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급선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가장 중요시할 것은 교육에 관한 일인데, 만약 미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인재를 양성해서 백방으로 대응한다면 아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그 법을 본받아야 합니다.

군용(軍容)의 정숙함과 기계의 정리(精利)함은 유럽에 비해 손색이 없고 현재 미국의 병력수효를 보면, 그 수가 2만여명에 불과하며, 이를 열군데 나누어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 국토의 넓이와 군대 수를 비교하면 그 대소가 아주 달라서, 이처럼 소수의 군대로 국가 방위를 충분히 담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문맹자가 거의 없고, 또한 해군, 육군의 무예를 겸하여 습득하지 아니한 자 없으므로 국민 모두가 장수가 될 수 있고 졸병도 될 수 있어서, 갑자기 어떤 긴급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백만의 군대를 신속히 동원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남북전쟁(1861~65) 때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병력 수효는 심히 적으며, 평화 시에는 양병의 명목이 없지만 민병(民兵)이 많이 있으므로 이 같이 위난을 당하더라도 양병의 실효를 충분히 거두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제도는 참으로 좋다고 봅니다.


홍영식의 '복명문답기'는 한미 외교 및 관계사로서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이 문서의 발견으로 최초의 미국 사절단 보빙사가 기록한 사료의 부족함을 그나마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에 관한 미국 내 기록은 그 당시 미국 현지 신문과 잡지, '미 국무부문서' 등에 적시되어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그러나 '복명문답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전권대신 민영익이 복명했다는 '승정원일기'에 간략한 기록만 있을 뿐이었다. 1년여에 걸친 조선 외교사절단 기록이 단지 몇장의 문답 형식의 기록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둘째, 이 문서는 1880년대 초의 한미외교 및 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미국의 정치·군사·국방·농업·상공업·전신·우편제도 등 미국의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그 견문기를 남겼다는 점에서 갑신정변의 주역인 홍영식의 개화사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셋째, 대조선국의 대미관(對美觀)의 전환을 이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양이관(洋夷觀)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1880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의 도입으로 쇄국정책에서 개항정책으로 전환했다. 신미양요(1871) 때만 해도 미국인을 '해적떼'(海浪賊)라고 비하하면서 인간 이하의 야만종으로 여겼다. 그러나 홍영식은 미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시찰하며 세계 최강의 부강국이자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문명국임을 확인한 내용을 '복명문답기'에 남긴다.

넷째, 우리 역사상 최초로 대미 자주외교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보빙사를 임명·파견하고,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워싱턴DC에서 각국 주재 공사를 접견하기까지 철저히 자주외교를 수행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군의 서울 주둔과 원세개의 내정간섭이 자행되는 시점에서 대미 자주외교를 완수한 것이다. 특히 조선의 국서에 청국 연호를 폐기하고 조선의 개국연호(開國年號)를 사용했다는 것은 대조선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한 것이다.

다섯째, '복명문답기'에는 아메리카라는 나라 이름을 '미국'(美國)으로 표기하고 대조선국을 한국어 발음으로 영문으로 'Tah Chosun'으로 표기한다. 조미조약(1882)에 일본어발음 '조센'(Chosen)으로 표기한 대목을 우리식 발음으로 바꾼 것이다. 또 한글 국서에는 미국 대통령을 'President'의 중국어 음사인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이라 표기했지만, '복명문답기'에는 '대통령'(大統領)이라 처음 표기한다. 이 '대통령' 표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참고자료
『승정원일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자주외교와 한미우호의 요람 주미대한제국공사관』(2019)
김원모, <자료> 「遣美使節 洪英植復命問答記」(1981)
김원모, 『상투쟁이 견미사절 한글국서 제정 上』(2019)

["한미관계 141년 비사"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