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⑥ 박정양 초대 주미특명전권공사 파견
청의 반대를 뚫고 자주권을 행사하다
미국은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1883년 5월 특명전권공사로 루셔스 푸트(Lucius H. Foote)를 파견한다. 서울 정동에 미국공사관을 개설하고 조선정부가 워싱턴DC에 조선공사관을 개설할 때까지 4년간 5명의 공사를 파견한다. 초대 공사 푸트를 시작으로 2대 포크(G. C. Foulk), 3대 파커(W. H. Parker), 4대 포크, 5대 락힐(W. W. Rockhill), 6대 딘스모아(H. A. Dinsmore) 등이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국내외 상황과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미국에 조선공사관을 개설하지 못하다가 청나라와 국내 친청(親淸) 세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887년 8월(양력 기준) 초대 공사 박정양과 서기관 이완용 등을 임명한다. 마침내 1888년 1월 미국 워싱턴DC에 조선공사관(1897년 이후 대한제국공사관)을 개설하는데 이는 서양 국가에 개설한 조선정부 최초의 재외공관이다.
청이 파견한 외교고문관 데니의 도움
19세기 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내외 정치적 상황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82년 6월 임오군란 이래 국내 정치적 불안과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의 내정간섭 및 경제적 사정으로 조선정부는 미국에 초대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해 상주하는 재외공관, 즉 주미 조선공사관을 개설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특히 일본의 지원 하에 감행했던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국 북양대신 리홍장(李鴻章)은 1885년 8월 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란 직함으로 서울에 상주시켜 조선의 외교와 통상은 물론 국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면서 청의 종주권을 강화한다. 1886년 4월에는 미국인 데니(O.N. Denny, 德尼)를 고종의 외교고문관으로 파견해 조선에 대한 간섭을 더욱 강화한다.
그런데 데니는 외교고문관을 지내던 1888년 근대국제법 이론에 근거해 조선이 청에 속한다는 속방론(屬邦論)을 부정하고 청의 간섭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이라는 주장을 담은 '청한론'(淸韓論, China and Korea)을 출판한다. 그는 결국 1890년 5월 청의 미움을 사 파면돼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때 고종으로부터 감사의 의미로 하사받아 가져갔던 태극기가 일명 '데니 태극기'라고 불리는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고종은 청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기 위해 1886년 7월 러시아와 제2차 '조러밀약'을 추진한다. 서울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Karl I. Waeber)에게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해달라는 문서를 전달한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막기 위해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이 직접 국정을 감독하도록 시도한다. 이때 데니는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양 각국과 폭넓은 외교관계를 맺어야만 한다'고 조언하면서 고종에게 서양 각국에 상주공사관을 개설할 것을 요구한다. 고종도 이에 호응해 청국과 속방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서구 열강에 조선공사관을 개설하고 공사를 파견하면서 대외적으로 자주외교를 천명하려 한다.
조선의 해외 공사파견 계획은 1885년부터 간헐적으로 제기됐다. 그러다 미국 2대 임시대리공사 포크(George C. Foulk)가 배청(排淸) 방안의 일환으로 권고하고, 청국·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맞물리면서 미국에 초대 전권공사를 파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고종이 미국을 우선 선택한 이유는 외교 고문관 데니와 1883년 보빙사 전권부사로 미국을 다녀왔던 민영익의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종은 외국에 파견된 조선공사가 청국공사와 대등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서양 각국에 청국과 조선이 자주외교를 펼치는 동등한 국가임을 과시하며 청국을 견제하려 한 것이었다.
조정 내 친청세력과 연미세력의 충돌
고종은 청국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1887년 7월 도승지 민영준(閔泳駿)을 주일판리공사(駐日辦理公使)로 임명하고, 1887년 8월 1일 일본으로 부임시켰다. 조선정부가 청국에 사전 보고없이 민영준 주일본공사를 임명·부임시켰음에도 청국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종은 자주권 행사의 일환으로 1887년 8월 18일 협판내무부사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내아문 협판 심상학(沈相學)을 주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전권공사로 임명한다.
고종이 미국과 유럽에 파견할 전권공사를 임명하자 청국은 조선이 원래 자국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박정양 일행의 파견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또 국내에서는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을 비롯, 김홍집(金弘集) 김병시(金炳始) 민응식(閔應植) 등 친청 대신들도 반대에 나선다. 즉 외교고문관 데니와 민영익은 전권공사 파견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심순택 김병시 김홍집 민응식을 비롯한 다수의 조선정부 대신들이 반대하면서, 조선과 청국 관계를 중시하는 '친청' 세력과 미국과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연미'(聯美) 세력이 충돌한 것이다.
여러 대신들은 반대이유로 청국과의 관계 악화 우려를 내세운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하는 청국과의 관계 악화는 외교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종이 미국과 '연미'를 모색하는 것을 전통적인 화이질서(華夷秩序)로 상징되는 기존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여겼다.
반대하던 청도 조건 걸어 대미수교 인정
이러한 신하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8월 7일 박정양, 이완용 등에게 사폐(辭陛, 외국으로 떠나는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하직 인사)를 받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훈유(訓諭)를 내렸다.
짐은 경이 원래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일처리가 치밀하여 정성으로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 수도에 주차(駐箚)하는 전권대신으로 특파하는 바이다. 경은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와 친목과 화호를 도모하는 데 힘쓸 것이며, 일을 논의할 때 모가 나지 않도록 하여 타협을 이룩토록 하고, 반드시 견문을 넓히되 우리나라 사정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를 올리도록 하라. 아울러 우리나라 상민(商民) 가운데 그 나라에 가서 체류하는 자를 보호해주며, 특별히 통상을 일으키는 방도도 강구토록 하여라. 그 나라 정부와 인민의 정형(情形)도 수시로 설법(說法), 채방(採訪)하며 그 나라에 주차하고 있는 중국 및 각국 공사·영사들과도 친밀히 교제하고, 또 각국의 사정을 자세히 탐문하여 일일이 보고를 올리도록 하라. 이것이 짐이 바라는 바이다.
청은 주미조선공사 파견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강경하게 저지하였지만, 고종의 강력한 파견의지와 미국정부의 반박 등을 고려해 9월 26일 박 공사가 임지(任地)에서 '영약삼단'( )에 응하는 조건으로 허락한다. 영약은 '별도의 약속', 삼단은 '세가지 단서'라는 뜻으로 청이 조선에 강요한 단서조항이다. 영약삼단과 관련한 구체적 내용은 다음회에 살펴보고자 한다.
주미 공사관 파견 인원으로는 전권공사 박정양을 비롯해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일등서기관 이상재, 번역관 이채연, 수원 강진희, 진사 이헌용, 무변 이종하, 종자 김노미, 종자 허용업, 참찬관 미국인 알렌(Horace N. Allen) 등 총 11명이었다.
■ 참고자료
-『고종실록』『관계사료』
- 장음환,『삼주일기』 권5
- 김원모 완역,『구한말 격동기 ;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2017)
- 김원모,『상투쟁이 견미사절 한글국서 제정 下』, 단국대학교출판부(2019)
- 박정양 저, 한철호 역,『미속습유』,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8)
- 이상재 저·한철호 역,『미국공사왕복수록』,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9)
- 정경민,「조선의 초대 주미조선공사 파견과 친청노선 강화」역사와현실 96(2015)
- 한종수,「주미 조선공사관 개설과 '자주외교' 상징물 연구-공문서 및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44(2014)
- 한철호,「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의 활동과 그 의의」, 한국사학보 77(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