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⑧ 청의 족쇄 거부한 박정양 초대 주미전권공사

'영약삼단' 파기 후 미국과 독자교섭

2023-08-18 13:25:22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전권공사 박정양은 고종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한달여가 지난 8월 8일(양력 9월 24일) 미국 워싱턴D.C.로 출발하려 했으나 '허락을 기다리라'는 청국 황제의 유지를 내세운 위안스카이의 파견 중지 요구로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발이 묶인다. 기약없는 기다림이었다. 이에 고종은 8월 22일(양력 10월 8일)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윤규섭(尹奎燮)을 급히 임명해 북경에 파견하고 고종의 자문(咨文)을 청국 황제에게 올린다.

… 가만히 생각하건대, 소방(小邦, 조선)은 대대로 청나라 조정의 은혜와 보호를 받아 왔으므로, 외교문제 한가지에 대해서도 특별히 돌보고 유지해 주어 미국과 맨 먼저 통호하는 것을 윤허하고 관원을 파견하여 도와서 일을 처리한 다음에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나 내치와 외교는 균등하게 자주를 가진다'는 등의 말을 성명하여 제후의 도리를 각별히 지키도록 하되, 각국에 있어서는 평등하게 서로 대우를 행하여서, 체제와 교섭 양쪽을 완전하게 되도록 힘쓰게 하였습니다.…

고종은 이 자문에서 의정부의 회답서한과 같이 '조미조약'을 체결할 때 리훙장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며 '별도조회문'을 언급한다. 고종은 별도조회문에 서술된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라는 대목과 '내치와 외교는 자주(自主)한다'는 두가지 말을 모두 인용한다. 그리고 '제후의 도리'를 지키고 '각국을 평등하게 대우'해 '체제와 교섭을 완전하게 되도록 노력한다'고 밝힌다.

1888년 당시 초대공사 박정양 일행이 묵었던 에빗하우스 호텔


별도조회문은 조선이 청국의 속방임을 명시하는 목적으로 리훙장이 삼조(三條)를 적용한 문서다. 그런데 고종이 이를 역이용한 것이다. 청국으로서는 조선의 외교권을 제한하기 위해 작성한 별도조회문이 의도와는 다르게 조선의 자주권을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외교'를 제한하기 위해 조청 관계의 준수를 요구했지만, 고종이 속방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자주외교'를 실현할 명분을 찾았고 청국이 조선의 외교권을 제한하려는 명분은 상실하고 만다.

영약삼단으로 조선에 족쇄 채우려 해

결국 청국 황제는 1887년 9월 3일(양력 10월 19일)에 '사신의 파견을 허락하며 미진한 일은 리훙장과 상의하라'는 내용의 상유(上諭)를 내려 파견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리홍장은 공사 지위를 '전권(全權)공사'가 아닌 '변리(辨理)공사' 파견으로 지위 격하를 추가 요구한다. 조선이 전권공사를 파견하면 해외에 주재하는 청국공사와 동급이 되기 때문에 급을 낮출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내심 조선공사와 청국공사가 미국에서 상호대등한 관계로 '자주외교'를 펼치기를 원했기 때문에 리홍장의 요구를 거절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자 이홍장은 1887년 9월 24일(양력 11월 9일)에 위안스카이를 통해 영약삼단(?約三端)의 준수를 요구한다. 영약삼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 조선공사가 처음 미국에 도착하면, 마땅히 청국공사관에 먼저 가서 보고하고, 청국공사와 그 나라의 외부(外部, 국무부)에 함께 가고 이후는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 조회 공연 회의 교제가 있으면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의 뒤를 따라야 한다.

하나, 교섭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을 조선공사는 마땅히 먼저 청국공사에게 알려서 긴밀히 상의하여야 한다.


리홍장은 청국 황제의 유지에 따라 영약삼단을 알린다면서 '영약삼단은 속방이 본분 내에서 당연히 행하는 체제'라고 규정하고 다른 나라들이 상관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청국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고 노골적이지만 고종으로서는 거절하거나 거부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었다.

고종이 '청국이 허락한 조미조약'과 서양의 요청을 근거로 전권 공사파견을 성사시키자, 리홍장도 조청관계 유지의 근간인 영약삼단의 준수를 들먹이며 서양의 간섭을 차단한 것이다. 리홍장으로서는 고종에게 우호적인 미국과 러시아의 개입을 막는 동시에 조선공사와 청국공사와의 대등한 관계도 실현될 수 없게 하려는 의도였다. 나아가 조청관계를 내세워 고종이 추구하는 '자주외교'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고종은 1887년 9월 25일(양력 11월 10일) 영약삼단의 준수를 수용하기로 했다. 전권공사 파견의 허락을 받은 터라 영약삼단을 거부하면 공사 파견은 힘들게 되기 때문이다. 전권공사 파견을 허락해준 것에 감사의 의미로 박정양과 주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전권공사 조신희를 보내 이후 일정을 이야기하고, 위안스카이는 이 자리에서 박정양과 조신희에게 영약삼단을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드디어 전권공사 박정양과 관원들은 미국으로 부임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간단하게 여정을 정리하면 1887년 9월 27일(양력 11월 12일) 서울을 출발, 제물포에 도착해 미국군함 오마하(Omaha)호를 타고(음력 10.2.) 부산을 거쳐 나가사키에 도착한다(음력 10.5). 이어 박정양 등은 홍콩(香港)에 들러 민영익을 만나고 요코하마로 돌아와(음력 10.24) 미국인 참찬관 알렌과 합류한다.

영국여객선 오세아닉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발해(음력 10.26)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양력 12.28, 이후 양력 표기)한다. 11명의 일행은 샌프란시스코항(桑港)에 도착하나, 승객 중 한명이 병에 걸려 미 대륙 상륙이 며칠 동안 지연된다(1888.1.1). 샌프란시스코 팔레스호텔에 2박3일 투숙하고(1.1~1.4, 6층 840호) 이어 센트럴 패시픽유니온(Central Pacific Union P.)의 버링톤 팬대륙 횡단열차(Burlington and Penn Vestibule Train)로 시카고를 거쳐(1.4~1.9) 워싱턴D.C.에 도착한다.

워싱턴D.C.에서는 에빗하우스 호텔(Ebbitt House Hotel)을 숙소로 정한다.(1.9) 박정양 공사 일행은 호텔에 머물면서 미 국무장관 베이야드(T.F. Bayard)를 방문하고(1.13), 며칠 후 제22대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Stephen,G. Cleveland)를 예방해 국서(國書)를 봉정(奉呈)한다(1.17). 그리고 최초로 미국 워싱턴D.C.에 주미조선공사관을 임대해 개설하고 비로소 본격적인 업무를 개시한다(1. 18).

청국공사에 보고하지 않고 교섭진행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의 미국 도착 사실을 안 주미청국공사 장인환(張蔭桓)은 1887년 9월 26일(양력 11월 11일)에 받은 리홍장의 전보에 근거해 미 국무부에 본인이 박정양을 데리고 가서 소개시켜줄 것이라는 내용의 조회를 박정양이 부임지에 도착한 날 보낸다.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라는 논리에 입각한 행동인 셈이다.

그러나 박정양은 청국공사관에 도착 사실을 직접 보고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미 국무부와 교섭을 진행한다. 장인환은 조선공사와 접견 일자를 약속했다는 베이야드의 회답을 받고 나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청국공사는 1888년 1월 11일 관원들을 조선공사 박정양에게 보내 청국공사관에 오지 않은 것을 항의한다. 하지만 박정양은 청국공사관의 항의에 대해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명령을 받은 것이 없다면서 이들의 영약삼단 준수 요구를 거부한다.

미국에서 '자주외교'의 시작은 영약삼단 파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 참고자료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행일기』,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5)
정경민, 「조선의 초대 주미조선공사 파견과 친청노선 강화」, 『역사와현실』96(2015)
한종수, 「駐美 朝鮮公使館 개설과 '자주외교' 상징물 연구-공문서 및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4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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