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2023-09-05 11:41:57 게재

20대 총선 6개월 전인 2015년 10월. 박근혜정권은 돌연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존 교과서가 종북좌파에 의해 서술됐고, 이들이 패배적 사관에 빠져 아이들에게 패배의식만 심어줄 것이기 때문에 국정화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22대 총선을 8개월여 앞둔 2023년 8월. 윤석열정권도 때 아닌 역사전쟁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정율성공원과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동상을 놓고서다. 보훈부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며 광주시가 추진하는 정율성공원을 직격했다. 국방부는 육사에 설치된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불을 지폈다. 논란이 일자 홍범도장군 흉상만 옮기겠다고 했지만 애초의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보수언론 등 진영 내부의 우려도, 홍 장군 훈장을 처음 추서한 게 박정희정권이었다는 사실도, 1800톤급 잠수함을 '홍범도함'이라고 이름붙인 게 박근혜정권 때였다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홍범도함 명칭까지 바꿀 수 있다며 한발 더 나간다.

역사전쟁이 권력 의도대로 된 사례 별로 없어

지금 윤석열정권은 이념전쟁에 푹 빠져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단언했다.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 운운한 광복절 기념사의 연장선이다. 홍 장군 논란과 관련해서도 "무엇이 옳은지 생각해보자"며 흉상 이전에 힘을 실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이념전쟁은 곧바로 역사전쟁으로 진화하게 돼 있다. 북한의 위협이 현재진행형인데다, 70년이 지나도록 한국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그 뿌리가 일제강점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신냉전 기류 속에서 진행되는 윤석열정권의 이념공세가 결국 홍 장군 전력 시비 같은 역사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적 수순이라 하겠다.

그런데 권력발 역사전쟁은 윤석열정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다. 역사를 왜곡해 통치기제로 삼으려고 했던 권력의 시도는 동서고금을 떠나 적지 않게 발견된다. 히틀러의 '아리안 신화'를 이용한 게르만 역사 조작, 무솔리니의 로마제국을 재건하겠다는 과대망상이 대표적 사례다.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박근혜정권의 국정교과서 시도나, 이명박정권의 건국절 논란도 궤를 같이 한다.

그러면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고 하는가. "국민을 길들이고 싶다면 현재가 아닌 과거를 장악하라"는 말이 있다. '과거 기억'을 재조직해 국민을 조종하고, 자신의 지위와 명분을 확고히 하려고 하는 것은 권력의 기본속성에 속한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 사례가 말해주듯 이념과 가치에 길들여진 군중은 동원하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다.

지금 윤 대통령도 그런 정교한 계획 속에서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틈만 나면 건국절 논란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사를 축소하려고 하는 윤 대통령 주변의 뉴라이트 논리에 매몰된 인사들이나 공안적 시각에 찌든 참모들은 그런 전제에서 역사전쟁을 시작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이 아닌 미국이 독립시켜 준 나라일 뿐이다. '독립운동 부정=친미=반공'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출발점으로 삼는 헌법정신도 이들에게는 딴나라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전쟁이, 특히 이념을 내세운 역사전쟁이 권력 의도대로 끝난 적은 없었다. 역사를 지배하고자 했던 권력이 오히려 역사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게 그간의 교훈이다.

"역사의 교훈 잊은 이에게 똑같은 일 일어날 것"

2015년 박근혜정권의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광범한 시민의 저항 속에 실패로 끝났다. 6개월 뒤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민주당에게 1당을 내줬다. 박근혜의 역사전쟁은 정권의 불행한 결말에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2023년 역사전쟁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지지층을 더 결집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총선승부에 결정적인 수도권과 중도·무당층의 선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갤럽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그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더 큰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치독일 최초의 유대인 수용소인 다하우 캠프(Dachau Concentration Camp)에는 하버드대 교수였던 현대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뼈아픈 경구가,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진들 위에 새겨져 있다. "역사의 교훈을 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똑같은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날 것이다."

남봉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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