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세계 뇌연구의 흐름과 한국의 뇌과학
최근 인공지능(AI) 챗봇이 일상적 사물에 대한 창의적 용도를 만들어 내는 과제에서 인간 참가자를 능가하는 성과를 보였다는 결과가 핀란드 연구팀에 의해 보고되었다. AI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AI의 능력을 인간 정신능력과 비교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AI와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AI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에는 오랫동안 쌓인 인간의 지각 및 인지처리에 대한 연구가 밑바탕이 되었다. AI기반 영상처리에 널리 쓰이는 컨볼루션 신경망(Convolutional Neural Network)은 시각피질의 시신경 세포가 방향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영감을 받아 인간의 시각처리경로와 유사하게 만들어진 기법이다. 1959년 신경생리학자인 데이비드 후벨과 토르스테 위젤은 고양이의 일차시각피질에 미세전극을 삽입해 특정 자극에 반응하는 뉴런의 속성들을 밝혀냈고, 이 연구는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20세기 중반까지 뇌 연구는 신경과학 분야에서 동물모델과 사람의 손상된 뇌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졌다. 손상뇌 연구는 큰 사고로 두개골을 심하게 다쳤거나 심각한 행동적 문제를 보이는 환자의 증상을 기록하고 사후에 뇌를 관찰해 뇌의 특정 영역의 기능 및 뇌와 인간행동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살아있는 뇌를 연구하기 위한 방법은 20세기 후반에서 현재까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뇌의 구조적 기능적 특성을 관찰할 수 있는 뇌영상 기법은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과 자기공명영상(MRI)이 있다. 특히 1992년 오가와 등에 의해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기법이 보고된 이래 인간의 뇌기능에 대한 인지신경과학적 연구가 활발해졌다. 뇌영상을 획득하는 방법은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기존의 뇌손상 연구에서 얻지 못했던 인간의 기억 정서 의사결정 판단과 같은 고등인지기능에 대한 결과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다양한 기초분야 투자가 뇌과학 발전 기반
뇌는 우리 신체의 일부이면서 중추신경계로써 정신작용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장기와는 달리 국가차원에서 육성하고 주도하는 연구분야이기도 하다. 주요 선진국들은 국가 정책으로 뇌연구에 관심을 갖고 대규모 뇌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미국은 2013년부터 ‘브레인 이니셔티브’를 진행해오면서 2022년까지 3조2000억원을 투입했고, 2026년까지 6조6000억원(50억달러) 규모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초창기 브레인 이니셔티브가 뇌질환 치료제 개발과 인간 뇌신경망 분석이라는 목표에서 출발했다면 이제는 전세계의 생물학 물리학 공학 임상의학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확장된 프로젝트로 성장해 세포에서 회로까지, 치료를 향한 여정이라는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이제 브레인(Brain) 2.0을 통해 뇌 세포 유형에 따른 인간 뇌 세포 아틀라스, 포유류 뇌 전체의 미세 연결지도, 정밀 뇌세포 접근을 위한 설비에 힘을 쏟고 있다. 전 생애에 걸친 인간 뇌 세포 지도는 다양한 신경질환 및 정신질환, 약물 오남용에 따라 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할 수 있으며, 질환에 따른 특정 신경 세포 유형을 밝혀내고 개인의 취약성을 파악해 질환을 예측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0년간 약 8500억원을 투입해 인간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과학자들은 상세한 뇌 3D지도 제작, 뇌 임플란트를 개발, 기억과 의식 같은 고차원의 인지기능 모델링에 힘써왔으며, 다양한 뇌 질환 치료법을 발전시키는 등의 진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2022년 네이처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프로젝트 기간 중 갑작스러운 지원 축소과 이에 따른 자금 지원 분쟁으로 집행위원회의 불협화음이 있었고, 여기에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당초 목표했던 전체 뇌에 대한 시뮬레이션에는 못 미치는 단편적인 성과를 도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미국의 브레인 이니셔티브가 2017년 생쥐 뇌의 세포 유형에 대한 아틀라스를 생성한 후 빠르게 다음 단계로 확장해 인간 뇌세포 지도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유럽의 인간뇌 프로젝트 연구자들은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뇌 3D지도를 확장한 디지털 트윈을 사용해 뇌질환 치료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자극에 반응하는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로봇을 개발하는 뉴로로보틱스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가까운 중국과 일본도 각각 차이나 브레인과 브레인/마인즈(Brain/MINDS)를 추진중에 있다. 중국은 2016년에 시작해 2030년까지 영장류 뇌지도작성을 통한 인지기능연구와 뇌질환 연구를 진행하는 계획을 갖고 있으며, 일본은 2014년부터 2023년까지 뇌구조 및 기능매핑 기술을 개발하고자 노력해왔다.
우리나라는 1998년 뇌연구촉진법을 제정해 뇌과학 뇌의약학 뇌공학 관련 분야의 뇌연구를 효율적으로 육성·발전시키고자 했다. 2003년 뇌 프론티어 사업을 시작으로 2006년부터 2023년까지 뇌과학 원천기술개발사업을 통해 뇌과학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지난해에는 뇌과학 선도융합 기술개발 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해 2023년부터 2032년까지 10년간 4500억원을 투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뇌과학 선도융합 기술개발 사업은 그간 쌓아 올린 기초를 바탕으로 뇌질환 극복과 뇌기능 활용을 목표로 하고 있다. 뇌질환 치료기술에는 뇌질환 표적 및 바이오마커 발굴, 오가노이드 및 동물모델을 활용한 뇌질환 모델 개발 등이 포함된다. 뇌기능 활용에는 뇌 신호처리를 통한 뇌 디코딩 기법 개발, 뇌-기계 상호작용 연구 확장, 뇌 자극 기술의 개발을 통한 뇌 기능조절 및 치료가 포함된다.
내년 6월 서울에서 열리는 2024 세계뇌기능매핑학회(OHBM)는 우리나라 뇌과학 분야의 영향력을 글로벌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시의적절한 기회가 될 것이다.
AI 겨울 사례 답습하지 않길
뇌과학은 특정 한 분야의 지원이나 노력으로 성과를 내기 어렵다. 다양한 분야가 융합되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수렴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다. 생물학 의약학 심리학 물리학 공학 그리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가 뇌과학의 연구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기초분야에 대한 투자가 뇌과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인공지능 분야의 보면 지금의 세번째 AI 봄 직전 장기간의 AI 겨울이 있었다. 그 시기 지원이 중단되면서 2000년대 초반 인공지능 연구를 꿈꿨던 연구자들에게 힘든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기회가 왔을 때 바로 분야를 선도할 수 있는 연구그룹은 많지 않았다. 과학기술 전반의 지원축소는 해당 분야의 연구 중단 뿐 아니라 인접분야의 위축을 초래하며 국가 과학기술의 큰 과업을 하나로 엮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공정한 연구환경을 구축하고 정비하는 일이 연구분야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일선 과학자들이 이 시기를 슬기롭고 지혜롭게 잘 헤쳐나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