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⑪ 화성돈 야연(夜宴, Evening Reception)에서 받은 문화충격
남녀가 서로 껴안고 춤추다니 '아찔'
1888년 1월 9일 미국의 수도 화성돈(華盛頓, 워싱턴 D.C.)에 도착한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외교관들은 17일 클리블랜드(Stephen G. Cleveland)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국서를 봉정하고 신임장을 제정한다. 이후 미국 행정부서와 각국 공사관을 방문하고,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등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 '영약삼단' 준수를 내세우는 청나라 공사와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미공사 박정양은 '미행일기'(美行日記)와 '미속습유'(美俗拾遺)에 미국의 문명과 풍습을 자세히 적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화성돈 곳곳에 방사선으로 뻗어있는 서클(Circle)과 초청을 받아 참여한 공식행사 야연(夜宴) 즉, 이브닝 파티다. 조선의 유학자이자 외교관의 눈에 비친 신세계와 신문화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화성돈 도로는 건물을 짓기 전 미리 가로와 세로로 나눠 도로의 번지를 정한다. 가로도로는 1, 2, 3, 4 등 아라비아 숫자로 동서로 뻗은 길에 번지를 매기고, 세로도로는 A, B, C, D 등 알파벳 26자를 사용해 남북의 가가호호에 번호를 매긴다. 이런 규칙을 알면 아무개 가(街), 아무개 번(番)을 찾기 매우 편리하다. 처음 오는 사람도 길을 헤매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다섯개 도로의 교통 요충지에 서클(circle), 십자형 도로, 도로와 양쪽에 인도(人道)가 있는 3가닥 도로, 쌍방도로가 있다. 왕래가 빈번한 큰 거리에는 이따금 화원이 있는데, 화원 안에 화초와 나무를 심고 철제 의자를 설치해 인민이 잠시 쉬는 데 편리하도록 구성했다.
조선도로개조 사업 모티브가 된 도로
하루는 박정양 공사가 공사관 일행과 밤에 공사관 주변을 산책하며 바라본 야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물화(物貨)의 번성함과 가로등(燈竿)의 밝게 빛나 비춤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도로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한 길은 차와 말이 다니는 곳인데, 모두 돌가루로 기름을 발라 단단하게 붙여서 비가 와도 진창이 되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다. 좌우의 두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인데, 모두 벽돌로 비늘처럼 깔아서 진흙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 길 양쪽 곁에 여러 종류의 나무를 10보 정도 떨어지게 심어 그늘이 짙고 푸르러서 사람들이 여름날의 폭염을 알지 못하고 다닌다. 이어서 화원에 갔다. 화원은 워싱턴 내 십자 길거리마다 철살로 둘러친 곳인데, 그 넓이가 혹 1만 혹 몇만으로 서로 다르다. 그 안에 온갖 나무와 별별 꽃을 심고, 혹 연못을 파서 물을 채우거나 물을 끌어들여 위로 내뿜게 만들어 매우 볼 만하다. 또 곳곳에 의자를 설치하여 인민들이 놀면서 쉬게끔 하고, 남녀가 서로 손잡고 노약자를 부축하고 이끌며 삼삼오오 왕래하는 것이 일상이다. 밤이 깊어서 돌아왔다.
가로등이 켜져 있는 도시, 셋으로 구분한 도로, 화원 등 박정양 공사는 목도한 주변 경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당시 가로등은 가스등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컴컴한 밤에도 매우 밝아서 마치 대낮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특히 돌가루와 기름을 발라 만든 차(車)와 말(馬)이 다니는 도로와 어류의 비늘처럼 벽돌을 깔아놓은 인도(人道)를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 도로구성과 체계는 1896년 전후 조선에서 시행하는 '도로개조사업'의 모티브가 된다. 당시 내부대신 박정양, 한성판윤 이채연 등은 도로개조사업의 실무를 맡았다. 한성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청과 협조해 경무관 이종하의 협력하에 추진했다. 이들은 미국 화성돈 파견 당시 경험한 방사상 도로망 체계를 경운궁(慶運宮)을 중심에 놓고 서클형식의 방사선의 길들로 조성한다.
위 화원의 설명 중 '연못을 파서 물을 채우거나 물을 끌어들여 위로 내뿜게 만들어 매우 볼 만하다'는 대목은 주미조선공사관 주변에 위치한 듀퐁서클(Dupont circle)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듀퐁서클은 1870년 조성돼, 당시 분수대는 물론 나무 화초가 있었고 그 일대에는 중국공사관과 영국 공사관 등 외국 공사관 건물들이 위치했다.
미국 풍속에는 다회(茶會, Tea party)라는 예가 있다. 매년 예수 탄생일인 12월 25일부터 이듬해 예수 사망일인 2월 16일까지를 '손님맞이 기간'이라 한다. 매년 이 기간이면 각부 장관은 다회를 열어 그 나라 행정관리와 상인 및 각국 공사를 초청하고 약간의 다과와 술, 안주를 마련해 손님을 대접한다. 초청한 주인 부부는 문 앞에 서서 참석하는 손님을 악수로 맞이하고 보내는 예를 취한다.
미국의 모든 공식적인 행사는 위의 속례(俗禮)에 따라 진행되었다. 박정양 공사와 조선 외교관이 경험한 미국의 이브닝 리셉션, 야연(夜宴)은 한마디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주미조선공사관을 개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27일 해군 장군 휘트니(W.C. Whitney)의 초대를 받은 박정양은 참찬관 이완용과 번역관 이채연, 알렌을 대동하고 참석한다. 이때 박정양 공사는 연회에서 미인들이 거의 옷을 걸치지 않고 벌거숭이 알몸으로 다니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아 이러한 나체 여인들을 쳐다보아도 괜찮으냐고 묻기도 했다. 또 이브닝 드레스의 긴 옷자락을 끌고 다니는 나체 여인이 추워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 박 공사는 자신의 두루마기 옷을 벗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게 해주면 어떻겠냐고 알렌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2월 7일 오후 9시 박정양 공사는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및 알렌과 함께 법무부장관의 야연(夜宴)에 참석한다. 다음은 그 일화다.
술과 안주가 낭자하고, 관현악이 연주되며 남녀가 서로 껴안고서 춤춘다. 대개 음악이 있으면 춤을 추고, 심지어 여인 중 저고리를 벗어 맨살을 드러낸 자가 태반이다. 혹 속적삼을 뚫은 모양으로 한 자, 혹 수건을 목에 두른 자, 혹 주옥으로 장식한 것을 늘어트려 목에 건 자, 혹 산발한 채 손질하지 않은 자, 혹 가발을 뒤로 늘어뜨린 자가 있다. 기혼녀든 미혼녀든 모두 연회에 참석해서 우리나라 안목으로 보면 어지러워 아찔하고 의아할 만하다.
총각행세 하며 미국 문화 즐긴 이하영
조선 외교관 중에는 외교관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도 유창하고 무도(舞蹈)에도 아주 능해 일제강점기에 유행하던 이른바 '모던뽀이'가 탄생했는데 그가 바로 서리공사 이하영이다. 박정양 공사가 '영약삼단'을 어긴 이유로 11개월 만에 소환되자 서기관 이하영이 서리공사로 임명됐다. 그는 어느 연회나 참석 안하는 곳이 없고 또 누구나 그와 무도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상투를 틀고 조선의 버선에 서양식 구두를 신은 이하영 서리공사는 언제나 금발미녀들이 환영하는 표적이 되었다.
이하영 서리공사는 미국 어느 유명한 부호 딸의 청혼을 받았는데 당시 조선의 국법상 외국인과 결혼은 금지돼 거절했다. 그러자 부호 딸의 어머니는 '자기 맏사위가 이탈리아의 장관이니 사위에게 부탁해 이탈리아 황제를 통해 고종에게 허락을 얻도록 하겠다'며 딸과의 결혼을 졸랐다는 일화도 있었다. 이하영은 조선에 결혼한 부인이 있었으나 미국 사교계에서는 총각행세를 했다. 결국 두 사람의 국제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조선의 유교사회와는 전혀 다른 미국 사회의 관습과 예절 때문에 주미공사 박정양은 적잖은 충격적인 경험을 겪는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할 때 절이 아닌 악수를 했으며, 야연의 일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각종 공사석 연회에 참석해 '남녀가 서로 껴안고서 춤추며' '기혼녀 미혼녀가 모두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나라 안목으로 보면 어지러워 가히 아찔하고 의아할 정도"라고 느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박정양은 미국에서 각종 연회와 공식 행사에 참여하고 생활풍습에 익숙해지면서 미국 사회의 문명과 풍속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 참고자료
1. 문일평, 「대미관계오십년사」, 『호암문일평전집』 제1권, 조선일보사출판부(1939)
2.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행일기』,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5)
3.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속습유』,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8)
4. 이상재(李商在), 「상투에 갓 쓰고 미국(米國)에 공사(公使)갓든 이약이, 벙어리 외교(外交), 그레도 평판(評判)은 조왓다」, 『별건곤』 창간호(1926)
5. 레디앙(http://www.redian.org/archive/125457)(2018)
6. 한국역사연구회(http://www.koreanhistory.org/7302)(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