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⑫ 화성돈 생가와 기념비 방문한 주미공사 일행

화성돈(조지 워싱턴)을 자주외교의 모범으로 여기다

2023-10-20 11:03:40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외교관들은 1887년 12월 9일 일본 요코하마항을 출발해 태평양을 건너 188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해 새해를 맞이한다. 당시 미국의 주요 6대 경축일은 뉴이어스데이(New Year's Day, 1월 1일)를 포함해 초대 대통령 화성돈(조지 워싱턴)의 탄생일(2월 22일), 알링턴 국립묘지 조혼일(弔魂日)인 메모리얼데이(Memorial Day, 5월 30일), 독립기념일(7월 4일), 사식일(賜食日)인 쌩스기빙데이(Thanksgiving Day, 11월 마지막 목요일), 마지막으로 예수의 생일인 크리스마스(12월 25일) 등이었다.

특히 1879년부터 미국 초대 대통령 화성돈의 생일인 2월 22일을 경축일로 지정해 존경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화성돈의 이름을 미국 수도 이름(Washington DC)과 기념비명(Washington Monument) 등에 사용했지만 대통령의 생일을 경축일로 지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건국의 아버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과 관심이 남다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박정양 공사 일행의 화성돈 생가 방문 사진(1888년 4월 26일)


미국 수도명은 초대 대통령 화성돈으로

1월 4일 샌프란시스코만 오클랜드에서 출발한 대륙횡단 열차는 조선 외교관 일행을 태우고 밤낮으로 달려 마침내 1월 9일 부임지인 화성돈(華盛頓)에 도착하는데, 박정양은 '미행일기'에 미국 수도 화성돈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화성돈(華盛頓)은 미국의 수도이며, 컬럼비아주(古倫飛亞州)에 속한 지방이다. 서기 1800년에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多馬遮費孫)이 필라델피아(匹羅達皮阿)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으며(실제는 제2대 존 애덤스(John Adams) 때임) 미국이 당초 독립할 때에 공을 세운 대통령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이름으로 이 수도의 이름을 붙였다.

박정양 공사는 화성돈 생일인 2월 22일자 '미행일기'와 '미속습유'에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대통령 화성돈에 대한 인물평을 자세히 적고 있다.

"미국 평민으로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1775년에 원수(元帥)로 추대돼 영국과 전쟁을 벌여 독립한 1776년에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었다"라며 미국 독립전쟁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당시 박 공사는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 봉정이나 신임장 제정 시 청국과 '영약삼단' 조항으로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었음을 생각하면 '영국과 전쟁을 벌여 독립한' 화성돈의 성과에 그가 어떤 감정과 생각이 들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세습 군위(君位)를 허락하지 않고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제한하였으며, 민의(民議)에 따라 선거(選擧)하였다. 대개 미국이 민주·독립을 이룩한 것은 화성돈으로부터 비롯된다"라며 대통령 세습제 제한과 선거를 통한 대통령 임기제 정착에 대한 모든 공로를 화성돈에게 돌린다.

화성돈 생가 방명록(1888년 4월 26일) Date: April 26 / Name: Korean Minister & Legation / Residence: Washington 으로 적었다.


이러한 박정양의 화성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화성돈의 생가(Mount Vernon) 및 화성돈 기념비(Washington Monument) 방문으로 이어진다.

1888년 4월 26일 박정양 공사는 서기관 이하영, 수원 강진희, 무변 이종하와 알렌 가족을 대동하고 화성돈의 생가인 마운트 버논을 방문한다. 참찬관 이완용은 4월 21일 병을 이유로 번역관 이채연과 진사 이헌용, 노자 허용업과 함께 화성돈을 떠난 상황이라 함께하지는 못했다.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출발한 일행은 포토맥강에서 기선(Steamboat)을 타고 마운트 버논까지 75리, 약 30㎞ 떨어진 거리를 방문한다.

워싱턴의 옛집을 보았다. 평소에 거주하는 곳인데, 방 안의 일용하던 기구에서 화원과 운동장까지 살아 있을 때 그대로 보존하였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현재 사는 것처럼 만들었다. 또 서거할 때의 혼령자리(靈筵) 등도 끝내 철거하지 않았다. 집 앞에 묘가 있는데 흙으로 메우지 않고 별도로 작은 집 하나를 지어서 쇠창살을 둘렀으며 그 안에 두 개의 관을 안치하였다. 이는 부부의 묘인데, 돌로 관을 만들고 관 위에 꽃을 놓았으며, 꽃이 시들면 반드시 갈아놓는다. 지금으로부터 100년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금도 착오가 없다고 하니 오랫동안 추모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정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수호한다. 또 그 집 밖에는 자손들이 잇대어 무덤을 썼으며, 후예들이 번성하여 그 근처에 살면서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기념비에 올라 고국을 그리워하다

주미공사 박정양은 10월 11일 본인의 병이 심각한 이유를 들어 고종에게 환국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낸다. 이틀 후 10월 13일(음력 9월 9일) 고국의 중양(重陽)을 맞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가족과 고국이 그리워 높은 곳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고자 공사관원들과 외교 참찬관 알렌을 데리고 공사관 밖으로 나들이에 나선다. 그는 화성돈의 거리를 보며 '낙엽이 길에 가득 찼고, 마른 풀이 한길에 줄지어 있으니, 눈에 가을빛이 가득하여 더욱 쓸쓸함을 느낀다.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데 적당히 갈 만한 곳이 없다'라며 당시 심정을 적고 있다. 알렌은 이틀 전 10월 9일에 공식 개관한 화성돈 기념비로 안내하는데 박정양은 인상 깊었는지 기념비 내외부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기록을 남긴다.

화성돈 기념비의 높이가 555피트(약 169m)이며 이집트(埃及國)의 피라미드(三角塚)와 높이가 비슷하다. 그 문의 넓이는 3칸이고 4면에 전등이 설치되어 있고 벽을 따라 50개 층과 898개의 철 계단을 돌아가며 소라껍질과 같이 굽게 설치하여 사람들이 편리하게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정중앙에는 30명 정도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였는데 지하에서 출발하여 비 위까지 12분 정도 걸린다. 비 안에는 각국의 돌을 수집하여 쌓았는데 돌마다 모두 작은 영문 글씨로 그 돌을 생산한 지방을 기록해 놓았다. 중국과 일본의 돌도 있는데, 그 돌에는 한문으로 기록하였다. 최상층에 도착하니 한 방처럼 장엄하며, 네 모퉁이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사람들이 여닫게 만들었다.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도로의 종횡(縱橫)이 바둑판같고, 가옥이 빽빽하게 겹쳐 있는 것이 조약돌을 쌓아놓은 듯하다.

이역만리 미국에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을 대표해 '자주외교'를 펼치고자 했던 주미공사 박정양은 화성돈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여겼다. 영국에 맞선 전쟁으로 자주독립을 이루고 대통령 임기제와 선거제도 등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킨 업적은 일국의 외교관에게 많은 영감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치는 어려운데 옛날을 생각하며 객지를 떠도는 자가 되었다'라며 당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 '한양을 추억하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만 헛되이 하늘만 바라보니 아득하고 조각구름이 가득하다'라며 화성돈 기념비 나들이를 마친다. 그런데 약 한 달 후인 11월 19일에 심신의 쇠약으로 아쉽게도 조선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 참고자료
1. 미국 의회도서관, 마운트 버논 도서관
2. 문일평 저, 이광린 역, 《한미오십년사》, 탐구당(1975)
3.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행일기》,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5)
4. 박정양 저, 한철호 역, 《미속습유》,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18)
5. 이범진 저, 김철웅 역, 《미사일록》, 국외소재문화재재단(2020)
6. 한철호,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의 미국관〉, 《한국사보》 66(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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