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시민의회는 민주주의 후퇴를 막는다

2024-05-10 13:00:02 게재

2024년 5월 8일,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시민의회 입법추진 시민모임 출범식’과 ‘시민의회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시민의회(The Citizens’ Assembly)는 지난 20년 간 민주주의 혁신을 위한 유력한 방안의 하나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집되었다.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주에서의 선거법 개정 시민의회 개최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시민의회는 서유럽과 북미주, 호주 뉴질랜드 등 서방권의 거의 모든 국가뿐 아니라 아시아(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와 남미(브라질 칠레 페루 멕시코 콜롬비아 파나마 등) 여러 나라에서도 개최된 바 있다. 그동안 다루어진 시민의회의 의제는 선거법 개정, 헌법개정, 기후위기 대응, 과학기술 정책, 교육 정책, 의료보건 정책, 주요 외교정책 등 매우 광범하다.

시민의회의 이론적 원리는 ‘민주적 대표성의 확장’과 ‘민주적 토론의 강화’다. ‘시민참여의 혁신’과 ‘심의민주주의의 물결’은 국제적인 시민의회 정치현상을 지칭하는 또 다른 언어다.

시민의회 의원은 층위 무작위 방식으로 선발(stratified random sampling)하는데 이는 통계적 대표성이 확고하게 입증된 방식이다. 소집된 시민의회는 해당 의제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토론 기회를 보장받는다. 이를 위한 표준적 개회 기간은 통상 최소 3개월에서 1년 정도가 된다.

이러한 충분한 토의 방식을 통해 초기 모임에서 여러 갈래로 갈리던 견해는 점차 2/3 이상의 합의에 이르게 된다. 202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 ‘숙의의 물결을 타다: 시민참여의 혁신과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가 보여주듯 이제 시민의회 방식을 통한 민주주의의 쇄신과 역할 강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공인받았다. 시민의회는 이제 학술 담론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실정치의 일상적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널리 운위되는 시점에 하나의 역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이자 동시에 필연이다. 널리 운위되는 그 ‘위기’야말로 민주주의에 새로운 보완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요청의 분명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가짜뉴스의 범람, 대화가 사라진 자기확증적 정치양극화가 지배하는 정치현실에서 모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숙의를 통한 정치적 합의 장치는 정치 자체의 쇄신을 위한 ‘굿뉴스’이자 자양분이다.

일찍 제안됐지만 해외 성공에 비해 미진

한국에서도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시민의회’ 제안은 2000년대 초반으로 세계적으로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본격적이고 대규모적인 시민의회 실험은 2017년 7~10월 간 열린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 건설·폐기 여부에 대한 공론화위원회’의 활동이었다. 이 회의는 ‘공론화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소집되었지만 위원 선출방식과 회의운영 방식은 이미 여러나라에서 표준화되어 있는 시민의회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이 사례는 소집 시기부터 상당한 관심을 끌었고 종료 직후 위원회 자체 보고서가 나왔으며, 바로 다음 해부터 많은 연구논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2018년부터 2022년 봄까지 문재인정부 4년은 가히 ‘공론화위원회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공론화위원회가 중앙과 지방의 정부 주도로 열렸다. 윤석열정부 들어 그 빈도는 크게 줄어들었으나 2024년 초 국회에서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에서 보듯 그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외에서 이뤄진 성공적인 시민의회와 비교할 때 그동안 한국에서의 대부분의 ‘공론화위원회’ 실험은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논의에 시민의회 소집-토론 방식을 약식으로 모방하는 수준에 그쳤다. 중앙과 지방정부가 ‘위로부터’ 의제와 논의 방식, 논의 기간을 정해서 아래로 시행하는 식이었다. 물론 이조차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부가 애초에 원했던 결정에 시민을 들러리 세우려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의제 설정에서부터 ‘아래로부터’ 시민적 요구를 잘 모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당정의 소통과 협력이 강화돼야 한다. 그렇게 선정된 의제에 대한 필수적인 사전 교육과 토론 기간이 충분히 보장돼야 한다. 그래야 공정한 정보 기회 속에서 공정한 토론이 가능하다. 이럴 때 비로소 시민의회가 ‘민주적 혁신’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 한국의 시민의회가 가야할 길이다.

한국 민주주의 저력 보였지만 정당은 불안

세계 여러 곳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지난 4월 10일 한국의 총선 결과 역시 한국민의 다수가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태를 위기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7~8년을 크게 돌아보면 한국은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 한동안 다소 예외적인 위치에 있었다.

유럽에서 인종주의적, 파시스트적 극우정당들이 크게 약진하고 영국은 갑작스러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했으며, 미국 대선(2016년)에서는 미국 민주주의가 세계의 병자가 되어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한국은 2016~2017년 촛불혁명을 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래서 서방 언론들은 하나같이 ‘이제 우리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경탄했다. 한국인들도 한때 그런 찬사에 스스로 도취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중반부터 한국에서도 민주주의 후퇴의 증상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독재정권 피해자들을 ‘홍어’요 ‘시체팔이’로 조롱하는 한국형 인종주의, 민주화 지지자들을 엉뚱하게도 도덕적 타락자라 무작정 우기는 한국형 극우 파시즘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K-방역으로 세계적 칭송을 받았던 한국의 코로나 대응조차 이들에게는 좌익의 음모요 규탄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순전히 촛불의 힘으로 등장했던 문재인정부는 그 역풍 앞에 이상하도록 무능하기만 했다. 2021년 윤석열정부의 출현은 그런 거대한 역풍의 승리를 말해준다.

이번 4.10 총선의 결과는 그렇게 출현했던 윤석열정부의 정체와 행태가 국민의 눈높이에 크게 못미쳤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세계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지형 속에서도 한때 ‘촛불혁명’을 통해 그 추세를 뒤집어 놓았던 한국 민주주의다. 하지만 최근 한국 역시 민주주의의 커다란 후퇴를 다시금 경험했다. 그러다 짧은 시간 안에 이를 다시금 반전시키는 저력을 다시 한번 발휘한 셈이다.

그러나 그 저력을 현실정치의 성과로 입증해 주어야 할 한국의 민주정당들의 현주소는 여전히 불안하다. 2020년 이미 시작된 역풍 속에서도 민주당이 180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코로나 정국이라는 행운 때문이었다. 그러나 180석을 가진 압도적 집권당이 되었으면서도 민주당은 민주주의 후퇴를 막는 데 무능했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오직 ‘정권심판’의 민심 덕에 범민주당권이 187석을 차지하게 되었음에도 이번에는 확실히 민주적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지 아직도 불안한 것이다.

시민의회 의제 수용한 정당 성공 주목해야

이번 시민의회 국제심포지엄에서 확인한 것은 첫째, 시민의회가 서구 민주주의의 후퇴에 맞서는 중요한 민주적 보루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민주적 정당들이 그 시민의회를 민주적 개혁을 위한 주요 동반자로서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의회가 활발한 서방 국가들에서도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은 이미 크다. 그러나 그중 민주적인 정당들은 시민의회에서 제기하는 의제들을 정당 정책으로 적극적으로 채택하면서 다시금 정당의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정당들이 성공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도 주목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김상준 경희대 교수 '붕새의 날개,문명의 진로’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