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음달 새 지폐 발행 앞두고 ‘들썩’

2024-06-17 13:00:10 게재

20년 만에 1만엔권 등 전면 교체 … 장농예금 감소, ATM·자판기 교체 등 경제효과 기대

일본 공영방송 NHK는 2021년 대하드라마 ‘푸른 하늘을 찔러라(靑天を衝け)’를 방영했다. 주인공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경제의 근간을 설계한 인물로 평가받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시부사와는 일본 새 1만엔권 얼굴이다.

일본인은 유별나게 현금을 좋아한다. 일본 중앙은행이 다음달 1만엔권 등 3종류의 새로운 지폐를 발행한다. 화폐의 액면단위를 낮추는 ‘디노미네이션’ 등 화폐개혁이 아닌 기능적 교체인데도 이를 둘러싼 경제적 기대효과를 놓고 논쟁이 뜨겁다.

신권 인식 기기 교체 최대 14조원 효과

일본 재무성은 새 지폐 발행으로 은행 자동입출금기(ATM)와 승차권 및 식당 발매기 등의 기기를 교체하는 데 5000억엔(약 4조4000억원) 이상의 경제적 기대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는 △새 화폐 발행 직접 비용 △새 화폐 발행에 따른 ATM 및 CD 기기 교체 비용 △자동발매기 교체 비용 등 직접 효과만 1조6000억엔(약 14조1000억원)으로 추산했다.

이처럼 각종 기기의 전부 또는 일부 부품의 교체가 필요한 이유는 새 지폐가 기존보다 첨단기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1만엔, 5000엔, 1000엔권은 도안 인물의 교체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은행에 따르면 위조방지를 위한 홀로그램 등 최첨단 기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기기의 교체가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ATM 기기를 제작하는 업체인 OKI 관계자는 니혼TV 인터뷰에서 “새 지폐에 대응하기 위한 ATM 수요 등으로 지난해 생산대수가 전년도 대비 2배 늘었다”고 말했다. 도쿄 시내에서 60여곳의 무인주차장을 운영하는 한 업체는 새 지폐도 인식할 수 있는 부품교환에만 대당 3만엔씩 180만엔(약 1600만원)의 비용이 추가로 들었다고 방송에서 설명했다.

각종 자동판매기기 제조업체 80개 기업이 가입한 ‘일본자동판매시스템기기공업회’ 조사에 따르면 다음달 말까지 ATM과 승차권 판매기 등 기간 인프라의 교체는 완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일본 전국적으로 220만대 이상으로 추정되는 음료수 및 각종 물품 자동판매기의 경우 기기를 교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자영업자들은 기기 교체에 따른 추가 부담에 난감하다. 도쿄는 물론 일본 어디를 가더라도 자그마한 식당까지 자동발매기가 확산돼 있어 이를 교체하는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아예 현금으로는 주문이 안되고 신용카드나 QR코드 결제 시스템으로 교체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도쿄 오오테마치에 있는 한 라면 전문식당은 지난해 10월 새 지폐 발행을 앞두고 현금 결제가 안되는 시스템으로 바꿨다. 식당 주인은 NHK와 인터뷰에서 “자동발매기 교체 비용으로 200만엔(약 1760만원) 가량 들었다”며 “현금 결제를 없애면서 인건비도 절감됐다”고 말했다.

이 식당은 현금 결제를 없애면서 하루 매출잔액을 정리하는 시간이 기존 30분에서 5분으로 단축되면서 월간 최대 20만엔(약 176만원) 가량의 인건비를 절약했다. NHK는 현금사용이 불가능해졌지만 손님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절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회사원과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도쿄 등 대도시는 현금없는 결제가 가능하지만 지방소도시 등 현금을 주로 사용하는 곳은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자영업자의 부담이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장농에서 잠자는 현금 40조원 햇빛보나

일본에선 고령자를 중심으로 집안의 장농 등에 많은 현찰을 보관하다 사망한 이후 이를 발견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이처럼 가정내 현찰로 보관된 현금을 이른바 ‘장농예금’이라고 한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 추산에 따르면 일본의 장농예금 규모는 무려 60조엔(약 530조원)에 이른다. 막대한 규모의 현금이 금융시장 밖에 있으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기 때문에 일본정부도 장농예금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민간기관에서는 다음달 새 지폐가 나오면 상당한 규모의 장농예금이 이동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는 2004년 새 지폐가 발행됐을 당시 장농예금이 7.5% 가량 감소했다는 사실을 기초로 이번에 4조5000억엔(약 39조6000억원) 규모가 다른 금융자산으로 이동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연구소 구마노 히데오 연구원은 “구 지폐를 갖고 있으면 왠지 불안감이 생겨 집안에 있는 현금을 다른 자산으로 옮길 것”이라며 “예금을 하거나 달러나 금 등 안전자산으로 옮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3년 7개월 만에 민간의 장농예금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한 이후 이러한 추세를 이어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노무라종합연구소는 집안에 보관해 놓은 돈을 바꾸려는 수요는 있을 것으로 보면서도 기대만큼 규모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새 지폐가 발행되더라도 기존 화폐를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6년 발행이 중단된 1만엔권도 종종 시중에 나온다고 한다. 기우치 다카히데 노무라종합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신권 발행에 따른 장농예금의 교체 수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물가상승에 따른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인한 자산이동 수요가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일본정부가 잠자는 현금과 예금을 끌어내기 위해 올해부터 내놓은 비과세 금융투자상품 신NISA의 확대도 한몫할 것으로 보인다. 신NISA는 연간 최대 360만엔(약 3200만원), 총액 1800만엔(약 1억6000만원)까지 비과세하는 투자상품이다. 금융청에 따르면, 현재 일본 가계의 평균 금융자산은 1785만엔(1억5700만원)으로 이론상 일본의 모든 금융자산 보유 가구가 신NISA의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인은 왜 현금을 사랑하나

일본에서 새 화폐의 등장에 환호하는 데는 일본인의 현금 사랑이 자리잡고 있어서다. 일본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 잔액은 2141조엔(약 1경8850조원)이다. 이 가운데 예금 등 저축성 상품과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액은 1127조엔(약 9920조원)으로 주식 등 다른 금융자산을 압도한다. 현금 거래 비중도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이다. 일본 경제산업성 추산에 따르면 ‘현금없는 결제’ 비중은 2022년 기준 36.0%(111조엔)이다. 현금을 통한 결제가 거래금액의 64.0%에 이른다는 의미다. 한국(6.4%)과 중국(17.0%), 영국(34.1%) 등에 비해 현금거래 비중이 압도적이다. 다른 나라가 빠르게 현금없는 세상으로 이동하고 있지만 일본은 상대적으로 늦은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1만엔권 유통 규모에서도 드러난다. 일본 내각부 추산에 따르면 1만엔권 유통량은 20년 전 65억장 수준에서 지난해 11월 기준 112억장인 것으로 나타났다. 20년 동안 1만엔권 지폐의 유통량이 72.3%나 증가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같은 기간 일본의 명목GDP가 7% 늘어난 데 비해 1만엔권 유통은 훨씬 많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국제결제은행(BIS) 통계에 따르면 2021년 일본의 화폐 유통량은 명목GDP 대비 기준 23.1%로 유로권(12.8%)과 미국(9.2%), 한국(8.1%) 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는 1990년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대규모 파산과 인수합병 등에 따른 혼란도 일본인의 현금 선호를 부추켰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소 구마노 연구원은 “금융불안으로 인해 은행에 자산을 맡기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며 “장기간 이어진 저금리와 저물가로 현금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낮았던 점도 원인”이라고 했다. 은행은 불안하고 물가는 정체돼 집안에 현금을 가지고 있어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고, 상속세 등의 기피수단으로 장농예금을 선호했다는 분석이다.

일본은행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금을 쓰는 이유에 대해 ‘바로 그자리에서 지불을 완료하는 것이 좋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국민들은 신용카드 등 후불결제를 하면 자신이 부채를 안고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며 “현금이라면 바로 쓰임새를 알 수 있지만, 신용카드 등은 과소비 우려도 있어 현금결제를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런 일본인 사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일본은행에 따르면 조사대상 40% 이상이 최근 현금사용이 줄었다고 답변했다.

한편 일본언론은 새 지폐의 등장을 계기로 다양한 사기사건도 일어나고 있다면서 주의를 당부했다. NHK 등 일본방송은 “인터넷상에서 기존 화폐로는 거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신 화폐로 바꿔야 한다면서 다양한 사기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며 “새 지폐 발행 이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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