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배상해야” vs “꾸준히 개선 노력”

2024-10-24 13:00:25 게재

대법원 전합, ‘장애인 접근 제한 시설 방치’ 국가 책임 공방

정부 ‘입법부작위 책임’ 쟁점 … 대법원장 “게을리한 것 아닌가”

경사로와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소규모 매장에 부여하지 않은 국가에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는지를 두고 대법원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A씨 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 청구 소송 상고심에 대한 공개 변론을 열었다.

이번 사건은 장애인을 위한 편의제공 의무를 부담하는 소규모 소매점의 범위를 규정한 시행령에서 시작됐다.

1998년 제정된 옛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편의점, 약국, 식당 등 소규모 소매점 중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인 곳에만 경사로 등 장애인 편의 시설을 설치할 의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바닥면적 합계가 300㎡를 넘는 편의점은 전국 편의점 중 3%에 불과해 장애인의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해당 시행령은 지난 2022년이 돼서야 ‘바닥 면적 50㎡ 이상’으로 강화됐다.

이에 A씨 등은 국가가 구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아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장애인 접근권이 침해받았다며 국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국가가 옛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입법자의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로서 위법한지, 나아가 손해배상 책임까지 성립하는지 여부다.

앞서 1심과 2심은 국가가 해당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위법하다고 하더라도, 고의나 과실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A씨 등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날 공개 변론에서 원고측은 국가가 24년간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원고측 대리인 이주언 변호사는 “장애인등편의법은 장애인 등이 일상생활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경사로와 같은 편의시설의 설치에 대한 기본 원칙을 정하고 접근권과 이에 따른 국가 의무를 명시한 것”이라며 “문제는 면적 300㎡ 이상에 이르는 소매점 거의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시행령이 만들어진 1998년부터 20여년간 통계를 보면 0.1%에서 5% 남짓”이라며 “결국 쟁점 규정은 입법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헌법상 기본권에 해당하는 접근권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라고 했다.

참고인으로 출석한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법의 취지를 살려 면적 제한 규정을 폐지하고 장애인의 접근권을 온전하게 보장해야 한다”며 “다시는 휠체어 사용자들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식당을 찾아 헤매지 않도록 책임을 물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대해 피고측은 국가가 부족하지만 장애인 접근권 향상을 위해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피고측 대리인 이산해 변호사는 “국가는 장애의 다양성 그리고 장애인 선택권을 중요하게 고려해 장애인 복지 정책을 수립하고 지원을 확대했다”며 “2024년까지 장애인 권리를 강화하는 내용으로 장애인등편의법을 87차례나 개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애인 접근권 강화 관련해 여러 법률이 시행됐는데 주요한 것이 장애인 활동 지원법이다. 혼자 일상생활을 하기 어렵거나 사회생활이 어려운 지체 정신 장애인들에게 활동보조 등을 지원하는 법”이라며 “소매점을 이용하는데 구매를 요청하거나 아니면 직접 이동하는데 보조를 받거나 할 수 있다”고 했다.

안성준 한국장애인개발원 팀장은 “정부는 장애 당사자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그간 편의 시설에 양적 팽창에서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며 “누군가에게는 느리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정부가 제도와 정책을 방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법관들은 질의 응답을 통해 정부 측의 장애인 접근권 향상에 미진했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20여년간 이런 상태가 유지됐다는 것은 그 장소에 갈 수 있어도 들어갈 수는 없었다는 뜻인데, 쉽게 대체되는 권리라고 말하는 데 놀랐다”며 “온라인 활동으로 쉽게 대체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전국에 면적 300㎡ 이상 시설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원고는 3% 미만, 피고쪽은 5% 이상이라고 답했다.

조 대법원장은 피고측을 향해 “법에서 요구하는 시설물에 대해 50% 이상이라고 해놓고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한다”며 “정부 주장대로 해도 5%대 접근성을 두고 시행령으로 우리가 할 바를 다했다고 주장하는 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의 부작위가 인정된다면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양쪽은 대립했다.

원고 측은 “1인당 100만원, 그보다 적은 10만원이라도 손해배상이 인정돼야 한다”며 “국가 재정 문제로 배상책임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정부측은 접근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침해됐는지 불분명하고 관련 제도를 유지·개선하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들의 과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안병하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원고의 접근권 침해로 인해 어떠한 현실적 손해가 발생했는지 주장과 증명이 없다”고 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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