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2024년 국제질서 관통하는 ‘연대와 연결의 정치학’
2024년 12월 3일 밤 한국 사회는 평온했다. 여의도를 휘감은 정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걸 국가 안위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국민은 없었다. 과다한 정치적 대립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북한에 핵무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북한이 절대 가질 수 없는 민주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에게 그날 밤 한국은 평온하지 않았고, 심지어 계엄이 필요할 정도의 국가위기로 인식된 모양이다.
이렇게 심각한 인식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지금 정부의 등장에는 문재인정부의 책임이 있고, 문재인정부의 등장은 박근혜 탄핵이 있고, 박근혜정부의 등장은 박정희 모델의 성공이 있고, 박정희의 등장은 이승만정부와 한국전쟁에 책임이 있다. 원인과 결과는 끝없이 이어진다.
사회과학 영역으로 넘어온 양자물리학의 설명이 유행하고 있다. 단순하게 얘기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발생하는 사건들 사이에는 소위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상호작용이 있다는 주장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가 서로 연결되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양자얽힘처럼 국제정치적으로 별개로 보이는 서로 다른 사건들이 보이지 않지만 긴밀하게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지난 30여년 간 전개된 적극적인 세계화로 인해 양자역학의 ‘입자(particle)’와 ‘파동(wave)’처럼 국제정치적 상호작용의 중요성과 범위는 훨씬 증대되었다. 2024년의 국제질서는 양자얽힘과 같은 연대와 연결의 정치학이 지배한 한해였다.
미국 주도 연대의 질서 더욱 빛 발해
연대는 연결에 비해 비교적 관찰이 단순하다. 미중갈등 구도에는 경쟁과 상호의존이 공존하는 모순적 관계가 발견된다. 지난 6월 시진핑 주석을 만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미중 간 상호의존을 의미하는 ‘디리스킹(de-risking)’의 중요성에 대해서 적극 설명한 바 있다.
한편 미국과 중국은 각자의 우호 국가 세력과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호국가군(群)과의 네트워크 강화는 미중갈등을 일정 수준에서 악화시키는 측면도 있고, 또한 동시에 일정 수준에서 약화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 미국과 중국 각자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한 제도적 완결성을 높이는 세력권을 형성하게 되므로 적대적 관계에 놓이는 블록화의 가능성이 더 높아짐을 의미한다.
미중 전략경쟁이 아니더라도 국제안보에서 연대의 중요성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연대를 통한 세(勢) 확보는 단연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과거 냉전기의 동맹질서는 물론이고, 세계화 이후 나토의 확장으로 인한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의 연대 구축,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국제질서의 독자 노선을 걷던 국가들과의 새로운 동맹 체제 구축 등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연대 강화의 사례들이다. 바이든행정부 마지막 해를 맞이해 우크라이나 전쟁 및 인태전략을 가속화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연대의 국제질서는 2024년 한해 동안 더욱 빛을 발했다.
한국정부 역시 연대가 유행하는 국제질서 변화에 적극 동참한 한해였다. 외교안보정책 리소스를 인태전략에만 집중적으로 투입했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통해 가치를 공유한 국가들과의 연대를 추구하기도 했고, 인태전략이라는 두꺼운 외투 안에서도 아프리카 아세안 유럽 지역 국가들과의 연대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국익을 추구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연대의 정치학을 구체적으로 증명한 국제안보 사건이다. 러시아의 침공을 설명하는 다양한 독립변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어쨌든 나토 확장이 몰고 온 러시아의 안보 위협이 가장 중요한 요인임에는 틀림이 없고 이 전쟁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견고한 연대가 구축되었다.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공고한 연대,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파병으로 인한 북한과 러시아 간 돈독한 군사연대가 형성된 것이 또한 사실이다.
흥미로운 점은 권위주의체제 국가들 간 연대가 뚜렷해졌고 러시아의 무력 사용이 미국의 우크라이나 보호를 위한 국제연대를 강화하기는 하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무력사용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는 없다는 점은 현 시점에서 나타나는 글로벌 연대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연결이 국제정치 흔든 한해
이러한 글로벌 ‘연대경쟁’이 국가운영(statecraft) 과정에서 각 국가의 전략적 의도와 의지를 전제로 한 외교안보적 선택이라면 ‘연결’은 개별 국가의 의지가 전제 되지 않는, 배경의 ‘의도하지 않음’과 결과의 ‘드러나지 않음’이 동시에 발견되는 ‘양자얽힘의 국제정치적 현상’이다. 공간적으로 또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가 서로 연결되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양자얽힘’처럼 국제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사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다.
2024년 한해 동안 국제사회는 ‘연결의 정치학’을 뚜렷하게 보여줬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중동사태는 수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세계화 30년 및 9.11 테러와 압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냉전종식은 서방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서방 진영의 완전한 승리’와 ‘서구 문명의 우월성 강조’로 이해되었다.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서방 자유주의 진영의 인식론적(epistemological) 판단은 서구 문명국가들과 그 외 지역 국가들 간 관계 설정의 존재론적(ontological) 실천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IS)의 출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독일의 유럽 내 리더십 강화, 작금의 중동사태 등으로 이어진 것이다.
연결의 정치학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단연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지난 30여년 동안의 나토 확장이 러시아의 안보위협을 초래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고, 여기에 더해서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 그리고 오바마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Asia)’ 정책이 우크라이나전쟁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 중국과의 전략경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행동 대응에 미국의 외교 리소스가 충분히 투입되지 못할 것이라는 러시아의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9.11 이후 중동 지역에 과도한 외교안보 자원이 투입되었다는 오바마의 판단 하에 뒤늦게 대중국 관리 정책에 몰두한 오바마행정부의 정책 옵션들, 이러한 요인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판단에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서로 다른 ‘입자(원소)’를 연결하는 파장의 생성을 위한 에너지의 작용이 중요한데, 오바마행정부에서 ‘아시아 재균형’이라는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실제 이뤄지지 못한 사실은 결국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에너지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에너지는 중국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과 호주의 대외전략이라는 에너지와 결합해 결국 ‘인도-태평양 구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의 정책적 노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거대한 파장으로 이어지는 ‘얽힘’의 연결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적에 맞게 연결성의 확인과 차단 필요
따지고 보면 모든 세상일은 서로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니 굳이 어려운 양자물리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결국 합리적이면서도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연결성의 ‘확인과 차단’이 필요하다. 2024년 12월 3일 밤을 국가위기로 규정한 생각과 그 사람들의 등장 배경을 무한정 파고들 필요도 없고 동시에 눈에 보이는 문제점에만 집착해서도 안될 것이다.
미국은 곧 국제연대와 연결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 아메리카 퍼스트의 신봉자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25년을 관통할 국제정치의 주제어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