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자경단’, 트럼프 막아설 유일세력?
미정부 적자·부채에 트럼프 감세·관세정책 맞물려 … 투자자들, 미국채시장 예의주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첫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적을 만났다. 채권 트레이더들이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며 정부의 권위에 정면 도전한 것. 이른바 ‘채권자경단(bond vigilantes)’이다. 이전 10년간 낮은 세금과 높은 국방비 지출로 미국 부채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배 증가했기 때문이다.

미국채 금리가 폭등하면 차입비용이 급격히 상승해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금융안정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결국 클린턴정부는 예산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지출을 삭감하는 인기 없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최측근 경제참모로 나중에 연방준비제도(연준) 부의장을 역임한 앨런 블라인더는 “클린턴은 어렵다 여겨진 대선에서 꽤 큰 차이로 승리했는데, 집권 후 채권 트레이더들에게 굴복했다는 생각에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채권자경단이 다시 돌아올지 궁금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로이터통신은 18일 “여러 시장 전문가에 따르면 오는 20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미국 채권자경단에 대한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경제지표가 더욱 우려스럽다고 입을 모은다”고 전했다.
클린턴 놀래킨 자경단, 트럼프에도 등장?
미국 GDP 대비 부채 비율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2배 수준인 100%를 향해 치닫고 있다. 현 추세로 간다면 2027년에는 미정부가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막대한 차입을 했던 2차세계대전 이후 최고기록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2017년 트럼프 1기정부 취임 당시 20조달러 미만이었던 미국 연방부채는 현재 28조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19일 현재 미국채 10년물 금리는 지난해 9월 저점 대비 1%p 넘게 상승한 4.623%다.
자산 3890억달러를 운용하는 투자운용사 ‘루미스 세일즈’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매트 이건은 “채권자경단이 언제 들고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로이터는 “과거 위기 분석에 따르면 무엇이 국채시장 매도를 촉발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시장의 신호엔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일단 패닉이 시작되면 상황은 빠르게 통제불능 상태가 돼 상당한 규모의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클린턴정부 재무장관이자 골드만삭스 공동회장을 지낸 로버트 루빈은 “국채금리의 급격한 상승이 경기침체나 금융위기를 촉발하면 채권 시장은 트럼프가 원하는 정책을 매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세금을 낮춰 경제성장을 촉진하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정부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무역관세로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같은 입장에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의 오랜 경제고문인 스티븐 무어는 시장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아쇠로 글로벌 경제성장을 해칠 수 있는 ‘대규모 관세’를 꼽았다.
반면 트럼프 정부인수팀 대변인 애나 켈리는 “미국민은 트럼프를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시켰다. 그가 선거 유세에서 한 공약을 이행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라며 “트럼프는 취임 첫날부터 이를 이행해 새로운 미국 성공의 황금기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정책 영향력에 반응 엇갈려
1984년 채권자경단이라는 용어를 만든 경제학자 에드 야데니는 “트럼프가 정부지출을 줄이겠다고 약속하고 오랫동안 채권시장에 익숙한 헤지펀드 매니저 스콧 베센트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하는 등 시장에 정통한 사람들을 정부에 중용하면서 시간을 벌었다”고 말했다. 그는 “루빈 장관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엇을 하든 재정적으로는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베센트 지명자도 트럼프에게 루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베센트는 최근 인준 청문회에서 트럼프 1기정부의 2017년 감세정책을 옹호했지만 연방정부 지출과 관련한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는 “미국의 막대한 적자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차입을 할 여력이 줄어든다는 의미”라고도 말했다.
트럼프의 또 다른 오랜 경제고문인 경제학자 아서 래퍼는 재정적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 감세정책의 초석이 된 래퍼곡선 이론을 주창한 그는 감세가 경제활동을 촉진해 향후 세수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경제고문을 지낸 래퍼는 “최근 국채수익률 상승은 새 행정부에 긍정적인 신호”라며 “트럼프 정책이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베팅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상품과 서비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빌리는 것”이라며 “이것이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했던 일이고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1980년대 감세와 지출 증가로 재정적자가 급증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이런 흐름을 되돌리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야 했다. 당시 채권자경단으로 클린턴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저명한 채권투자자 빌 그로스는 경제성장으로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래퍼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로스는 로이터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미국 넘어 전세계 파급효과
채권매매 결정에는 국가의 성장전망, 인플레이션 궤적, 채권 수요·공급 등 다양한 요인이 반영된다. 현재 일부 지표는 장기간 돈을 빌려주는 것이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투자자들이 채권에 더 많은 이자를 요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지표 중 하나는 국가의 성장잠재력과 차입비용을 비교하는 것이다. 차입비용이 장기적으로 성장률보다 높으면 신규차입 없이도 GDP 대비 부채비율이 증가한다. 지속불가능 위험이 있다.
연준은 미국의 장기 실질성장률을 1.8%로 보고 있다. 인플레이션 목표치인 2%를 고려하면 명목상 성장률은 3.8% 수준이다. 미국채 10년물 수익률은 현재 약 4.7% 안팎으로 이미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현재의 성장궤도만으로는 부채 수준을 감당할 수 없다.
거시경제 전문가 루크 그로멘은 최근 “미국채 10년물 수익률이 명목 성장률 이상으로 상승하면 부채의 파괴적 소용돌이를 빠르게 촉발할 것이 수학적으로 확실하다”며 “이러한 상황이 이미 발생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경고했다.
유럽도 비슷하다. 영국 예산감시기구는 장기 실질 성장률을 평균 1.75%로 추정한다. 2% 인플레이션 목표를 포함해도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약 4.7%)에 뒤처진다.
국채시장이 트럼프정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전망이다.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자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핵심인 미국 금리가 급등하면 전세계에 충격파를 던진다.
글로벌 국채시장은 불안에 떨고 있다. 최근 영국채 30년물 수익률은 2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11월 프랑스와 독일의 국채 10년물 스프레드는 2012년 유럽 재정위기 이후 최고치로 상승한 바 있다.
로이터는 “정부의 높은 차입비용은 결국 소비자와 기업에 전가돼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채무불이행을 증가시키며 주식시장 매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채시장은 트럼프정부의 지출 삭감과 감세 조치의 영향을 지켜보고 있다. 실망감이 커지면 경계심리가 촉발될 수 있다. 미국 부채한도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거나 미국 신용등급이 추가로 강등되거나 제재와 전쟁 등의 이유로 미국채에 대한 해외 수요가 감소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다. 헤지펀드 ‘브릿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 레이 달리오는 “여러가지 많은 촉발요인이 있다”고 말했다.
영국 경제자문기업 ‘로레서 어드바이저리’의 파트너 니콜라스 스피로는 18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칼럼에서 “국채시장이 트럼프를 징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건 좋은 점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국채시장의 반란이 미국경제는 물론 전세계 다른 나라의 경제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건 나쁜 점”이라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