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포괄적 미국 주민 대변하는 ‘보편적 트럼피즘’이 온다
“까치 까치 설날은” 우리가 오랫동안 새해를 맞이해 온 방식이다. ‘반달 할아버지’로 유명한 윤극영 선생님이 지은 동요인데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마음이 기막히게 어우러진,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다.
언제부터인지 필자에게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은 국제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두 개의 행사로 대체되었다. 하나는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인 CES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보스 세계경제 포럼이다. 올해의 경우 CES는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고, 다보스포럼은 스위스 현지 시간으로 그저께인 22일에 개최되었다. ‘까치’로 시작하는 한해는 인간의 한 세대로 알려진 30년에 가깝고, CES와 다보스포럼으로 시작하는 한해는 반도체 주기인 1년과 딱 맞아떨어진다.
새로운 노멀로 떠오른 트럼프 정책
2025년 올해에는 CES와 다보스포럼 사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끼어들었다. 미국 시간으로 지난 월요일인 20일 정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했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으로 워싱턴 정계의 이단아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4년 만에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대통령직에 복귀하며 ‘미국 우선주의 시대 2.0’을 선포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미국의 황금시대는 이제 시작된다”고 선언한 뒤 “나는 매우 단순히, 미국을 최우선시할 것”이라며 과거 2017년 1월에 했던 집권 1기 취임사와 마찬가지로 미국 우선주의를 국가 운영의 최우선 가치로 내세웠다.
취임사 일부를 인용하자면 “우리는 세계에서 본 적 없는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건설할 것”이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성공을 우리가 승리한 전투뿐 아니라 우리가 끝낸 전쟁,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가 시작하지 않은 전쟁에 의해 평가할 것”이라고도 언급했다. 이러한 주장은 대외 군사개입을 자제했던 트럼프 1기와 달리 선택적 군사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2기를 특징화했다.
국내 언론에서는 ‘트럼프판 신고립주의’에 집중하지만, “내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은 피스메이커(평화중재자)이자 통합자일 것”이라고도 얘기했듯이 트럼프 대통령이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주권침해라고 판단한다면 즉각적으로 되돌리려는 군사주의적 시도가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린란드의 영토 편입, 멕시코만의 명칭 변경, 그리고 파나마운하 운영권을 되찾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이 그냥 던진 선거전의 구호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2016년의 트럼피즘이 미국 내 특정 보수주의를 대변했다면,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피즘은 보다 포괄적인 미국 주민을 대변하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가치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경제 정책에서도 ‘미국 우선주의’는 더욱 선명해질 전망이다.
2월 1일부터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추가 10% 관세 인상을 결정했고, 미국을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중요한 이웃 국가인 캐나다 및 멕시코 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 25% 인상을 공식화했다. 일찍이 국경이 사라진 세계화 시대의 관세 인상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미국 소비자에게 그 인상분이 고스란히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을 트럼프 대통령이 모를 리 없지만 수입 품목에 대한 관세 인상은 트럼피즘의 노멀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전기차 우대정책을 포함한 바이든행정부의 친환경 산업정책인 ‘그린 뉴딜’의 종료를 선언했다. 이와 동시에 4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2기 트럼피즘은 국제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이기주의에 그치지 않고, 절대적 약자에 처한 이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멕시코를 향한 국경에 대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남부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아무런 서류 없이 입국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심사 대기기간 중에 미국 내 체류를 불허하겠다는 강경한 차단책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모든 걸 받아들이는 ‘용광로’ 미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보편적이고 일상화 된 트럼피즘의 핵심은 에너지 정책에 있다. 소위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내에 프래킹(일종의 신속 채굴 방식) 기법을 통한 석유시추를 확대하겠다고 공언했다.
작년 여름 미국 대선 선거전이 한창일 때, 당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버틀러라는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 외곽 도시에서 괴한인 쏜 총알이 귀를 스치는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긴 바 있다. 피츠버그에서 버틀러에 이르는 약 40마일 일대는 미국 철광산업 즉,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러스트벨트의 한가운데다. 베트남 전쟁 최고의 영화 ‘디어헌터’에서 ‘유에스틸’의 철공 노동자인 로버트 드니로가 친구들과 사슴 사냥을 떠났던 바로 그 지역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러니컬하지만 트럼프 당선은 하나의 운명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거부와 엘리트 전유물 된 미국 정치
오래 전 영국에서 시작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남북전쟁 이후부터 지금의 공화 대 민주 양당제도가 정착되었고, 19세기 말 경험한 엄청난 경제성장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업 노조 언론 과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친 전문가들이 미국 의사당에 진출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유일의 경찰국가가 되면서는 조금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해외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의원들도 의회에 속속 등장했다.
한마디로 미 의회는 하나의 작은 세계와 다름없었다. 미국의 국가이익이라는 대전제가 있긴 했지만 세력들 간 다툼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물론 의회에서의 다툼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1980년대 이후 잦은 행정부 폐쇄에서 보듯이 협상과 조정이라는 의회 민주주의 핵심 규칙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한 게 문제였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꼽자면 미국은 다른 어느 국가도 갖지 못한 고유한 자산이 있는데, 바로 달러패권을 기반으로 한 경제력과 압도적인 군사력이 거대한 두 축이 되어, 국제질서를 규준하는 최정점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1등의 자리를 빼앗긴 건 아니지만 중국의 추격이 거세고, 무엇보다도 미국 스스로 유럽 아시아 중동 등지에 투입할 리소스가 점차 고갈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치는 거부(巨富)들과 일부 엘리트 집단의 전유물이 되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민주당의 무기력이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다.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가 쓴 베스트셀러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정당의 역할은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지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트럼프에 모든 걸 쏟아붓는 것만이 정답
다시 CES와 다보스포럼으로 돌아와보자. 오랜 만에 CES에 모습을 드러낸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양자 컴퓨팅’ 시대를 예고했다.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소프트웨어의 발달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이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동시에 국내 어느 기업은 다보스포럼이 발표한 지속경영가능 세계 100대 기업중 배터리 분야 1위 기업에 랭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은 CES와 다보스포럼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트럼프행정부 2기를 맞이해 비록 우리가 양자물리학의 결과를 의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모아 노력한다면 충분히 구체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교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작년 7월 당시 트럼프 후보의 귀를 스친 건 총알이 아니라 공동체적 통합에 주목하라는 미국과 세계인의 외침이었다. 안타깝게도 총탄이 전하지 못한 메시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될 리는 만무하지만 거래적 관점으로 외교를 이해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모든 걸 쏟아붓는 우리의 노력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