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굼뜬 ‘민주회복’ 속도에 답답함 불안감
“제발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내란수괴 혐의로 구속 기소된 후 헌법재판소 탄핵법정에서 보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황당하고 철면피한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보기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국민들이 많다. 뻔해 보이는 결론을 어떻게든 뒤집어보겠다고 너무도 분명한 사실조차 모두 부인하는 억지생떼에 질리고 지레 지친 탓일 게다. 정치적 불확실성을 빨리 제거해야 국가신인도를 회복해 나라도 정상화되고 서민들 살림살이도 나아질 터인데 전망이 불투명하다.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국격이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참담함을 겪었지만 그나마 시민저항으로 친위쿠데타를 막아내고 법에 규정된 절차대로 ‘민주주의 회복력’을 발휘하는가 싶어 위안을 삼아오던 터에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다. 내란동조·옹호세력의 막무가내 발목잡기와 무기력하게 끌려만 다니는 굼뜬 행보는 답답함과 울분을 자아낸다.
온 국민이 내란행위 다 지켜봤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온 국민이 불안과 공포 속에 조마조마하며 실시간 지켜본 계엄군의 국회침탈을 놓고도 ‘대국민경고용’이었다느니,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호소’였다느니 하는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모습에 울화가 치미는 것은 너나없이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굳이 위안을 찾자면 거짓으로 점철된 윤석열의 위선과 비루함을 온 국민이 날것 그대로 생생히 확인하는 기회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필자가 보기에 단연 ‘압권’은 두가지다. ‘바이든-날리면’과 함께 두고두고 ‘윤석열어록’으로 길이 남을 것 같다. “끌어내라고 한 것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요원’이었다”는 변호인측 궤변과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치 호수 위에 떠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본인의 ‘준비된 요설’이 그것이다. ‘요원’ 발언이 만인을 실소케 한 설익은 개그수준의 ‘아무말대잔치’였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세상을 온통 자기위주로만 보는 윤석열의 저열한 인식을 고스란히 상징한 말이다.
내란이 실패해 ‘자폭 쿠데타’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성공했더라면 현실로 닥쳐왔을 끔찍한 일들은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비상계엄포고령 제1호에 이어 2호, 3호, 4호가 순차적으로 발표되며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때 벌어진 유혈사태가 서울 한복판에서 훨씬 더 큰 규모로 잔혹하게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국회가 계엄해제를 재빨리 의결하지 못했다면 윤석열이 공언한 ‘반국가세력 사냥’은 차곡차곡 실행됐을 터이다.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내란기획 시나리오에 따르면 결코 과장된 몽상이 아니다. 이제까지 알려졌던 우원식 이재명 한동훈 등 당일 체포대상 16명 명단 외에 추후 체포가 예정된 대상들도 새로이 드러났다. 반국가단체로 지목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민주노총의 소속원들과 현직 ‘좌익판사들’, 문재인정부 당시 총경급 이상 경찰간부들, 청와대에 파견된 행정관급 공무원까지 내란비선 노상원 수첩 ‘수거대상’ 명단에 무더기로 올라 있음이 추가로 보도됐다.
여기에 계엄해제 결의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저항하는 야당의원들까지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포함시키면 수거대상은 무한정 늘어난다. 선관위 직원들을 겁박·고문해 부정선거 조작 ‘자백’을 받아내려 한 각본도 충실히 이행됐을 터이다.
‘반국가언론’으로 낙인찍은 MBC JTBC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그리고 여론조사 꽃 등 5곳에 대한 단전·단수조치로 비판기능을 마비시키고 그 밖의 언론사나 비판 유튜버들 입도 꽁꽁 틀어막아 국민저항을 최소화해 제압하려 했을 것이다.
답답하고 시간 걸리더라도 탄핵은 정해진 길, 희망 잃지 말아야
하지만 윤석열 탄핵·파면은 시간문제일 뿐 이미 정해진 결론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내란동조세력들이 일부 헌법재판관을 공격하는 것부터 탄핵기각 가능성을 높이려고 논리적으로 다투는 자세가 아니다. 사실상 윤석열을 버린 것이다. 헌재가 파면을 선고하면 불복하겠다는 밑자락을 미리 깔아두고 이후 펼쳐질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궤멸을 막기 위해 열성지지층을 고무하려는 자구책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윤석열 자신도 탄핵은 피해갈 수 없음을 예감하고 있는 것 아닐까. 다만 극렬지지층을 선동하며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요행을 바라거나 존재감을 과시해 극형을 모면하고 전두환처럼 특별사면을 도모하는 것일 수 있다.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 비상계엄 선포 일주일 전 발표돼 울림을 주었던 천주교사제 1466인 시국선언문의 제목이다. ‘거짓의 사람’ ‘폭력의 사람’ ‘어둠의 사람’ ‘분열의 사람’ 너무도 적확히 표현했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