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특별법과 경쟁력 제고
“주52시간도 ‘과로’, 몰아치기식 장시간 근로 건강 위협”
WHO, 주 55시간 이상 근무시 허혈성 심장질환 17%, 뇌졸중 35% 증가 … SK하이닉스 특별연장근로 없이도 세계 최고 경쟁력
“3개월간 계속된 야근 끝에 3일 연속 밤을 새운 날, 갑자기 심장이 엇박자로 뛰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는 걸 온몸으로 체감했다.”
2012년부터 삼성전자 연구개발 직군에서 일하는 한기박씨가 증언한 ‘몰아서 일하기’ 위험성이다. 정부와 국민의힘이 반도체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주52시간제 적용 예외를 두는 ‘반도체특별법’ 2월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총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는 등 일정 범위 내에서 주 52시간제 예외를 검토하는 것은 노동시간 단축, 주4일제 추진과 양립 가능하다”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20일 정부와 여야가 참여하는 ‘국정협의회’ 첫 회의가 열린다. 이날 회의에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우원식 국회의장,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반도체특별법이 논의될 전망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도체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규탄했다.

한국노총 금속노련,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SK하이닉스 노조 등 노동·시민사회·진보정당 연대체인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은 참여연대,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종민 무소속 의원과 함께 1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광장의 요구에 반하는 반도체특별법, 문제를 말하다’ 토론회를 열었다.
◆“화장실 가다가 쓰러진 선배보고 멍했다” = 한기박씨는 5~6년 전 ‘아직도 잊히지 않는 더 충격적인 경험’도 소개했다.
“함께 일하던 선배가 야근하던 중 화장실로 가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곧바로 달려가 의식을 확인하고 119에 신고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상식적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업무에 쫓기며 몽롱한 상태였던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를 바라보기만 했다. 과로가 단순히 개인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넘어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력마저 마비시킨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씨는 “연구개발 노동자들은 프로젝트 기간 동안 ‘피크기간’이 존재한다”며 “그 기간이 수일로 끝날지, 6개월 이상 이어질 지는 프로젝트가 끝나야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부에서는 52시간을 넘어가면 공짜야근을 하니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력을 충원해 무리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 14년차 변희범씨는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지금도 고과 평가라는 압박으로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연장근로를 감내하는 동료들이 존재한다”며 “근로시간 유연화가 정식으로 허용된다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추가적인 근로를 강요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반도체특별법은 단순히 한 업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노동자 보호의 근간을 이루는 법적 안전망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후공정업체에서 28년째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일하는 이수옥씨는 “회사는 몇몇 공장 제조팀의 이름을 ‘R&D센터 테스트연구부서’라고 바꿨고, 오퍼레이터에게 ‘연구원 지원·보조’라는 이름으로 근무를 시키면서 주5일 중 5일을 잔업해도 생산물량을 맞춰야 한다며 휴무일에 특근을 시킨다”고 말했다.
◆‘고소득 연구개발직군’ 한정이라지만 불규칙 노동 위험도 마찬가지 =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발제에서 “바짝 일하고 쉴 수 있다 하더라도, 바짝 일하는 동안 과로하면 건강에 악영향 미칠 수 있다”며 “반도체특별법 적용 대상을 ‘고소득 반도체 연구개발직군’으로 한정한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불규칙 장시간 노동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최 활동가는 이재명 대표에 대해 “주52시간도 이미 충분히 과로에 해당한다”며 “주 50시간 혹은 55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고 말했다.
최 활동가는 “국민건강영양조사와 통계청 사망자료를 연계해 분석하면, 주 35~44시간 근무자와 비교해 45~52시간 근무자는 3.89배, 52시간 초과 근무자에서 3.74배 자살 위험이 높았다”고 주장했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가 발표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뇌심혈관질환 질병부담 연구’에 따르면 주 55시간 이상 근무 시 허혈성 심장질환은 17%, 뇌졸중은 35%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고용노동부 고시상 과로로 인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도 발병 전 ‘12주간’ 1주 평균 근로시간 60시간, 발병 전 ‘4주간’ 1주 평균 64시간 초과하는 경우로 보고 있다.

◆“헌법상 포괄위임금지원칙·과잉금지원칙 위반” = 신하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위원장(변호사)은 발제에서 반도체특별법이 헌법상 포괄위임금지원칙과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발의한 반도체특별법 제34조 2항의 ‘근로기준 적용과 근로자의 건강권 보호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가 포괄위임금지의 원칙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신 변호사는 “헌법재판소는 국민 권리와 의무에 관한 본질적이고 중요한 사항은 국회가 직접 규율해야 하고 위임할 경우에는 필요성과 예측가능성이 확보돼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반도체특별법은 근로시간이라는 본질적 근로기준을 시행령에 위임하면서도 그 필요성과 대략적인 내용을 전혀 추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 변호사는 “또한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 제32조 3항에도 위배된다”고 말했다.
신 변호사는 “현행 근로기준법은 이미 다양한 근로시간 유연화 제도를 두고 있다”면서 “특별연장근로제도를 통해 연구개발 목적의 장시간 근로가 가능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와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을 통해서도 충분한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 변호사는 특별연장근로를 단 한차례도 신청하지 않은 SK하이닉스 사례를 들었다. SK하이닉스는 현행 선택근로시간제를 활용해 2주 또는 4주 단위로 노동자가 업무시작과 종료를 결정하도록 했다. 특정기간에는 주 52시간을 초과해도 총 근로시간은 증가하지 않도록 운영하고 있다.
박홍배 민주당 의원이 고용부로부터 받은 2023년 1월부터 11월까지 특별연장근로 신청 현황을 분석한 결과 총 6112건의 신청했다. 이 중 업무량 폭증이 3989건으로 65.2%를 차지했다. 이어 재해·재난(18.0%), 돌발상황(6.4%), 인명·안전(4.3%)이 뒤를 이었다. 특히 연구개발을 이유로 한 신청은 26건으로 전체의 0.4%에 불과했다.
2023년부터 2024년 10월까지 반도체 기업들의 특별연장근로 활용 실태를 살펴보면 삼성전자가 가장 적극적으로 제도를 활용했는데 22건의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해 모두 승인받았다. 삼성전자는 이 기간 3016명(중복포함)을 대상으로 43만4304시간의 특별연장근로를 실시했다. 다른 반도체 기업들의 특별연장근로 활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LX세미콘이 2024년에 1회 신청한 것이 유일했다.
신 변호사는 프랑스 독일 대만 등 해외사례를 검토한 뒤 “근로시간 유연화는 △명확한 상한 설정 △실효성 있는 건강권 보호조치 △엄격한 법 집행이라는 세가지 조건과 결합될 때 그 취지를 살릴 수 있다”며 “특히 대만 TSMC 사례는 근로시간 규제가 반도체산업 경쟁력을 저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노동자 건강을 담보로 한 근로시간 유연화는 명분이 없다”며 “국회는 근로시간 늘리기 시도를 그만하고 오히려 주 11시간 연속휴식과 연장근로시간 상한 설정을 보완하는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되면 조선 배터리 건설 등도 예외 요구할 것” = 김영미 금속노련 정책기획본부장은 “삼성전자는 일부 연구직에 특별연장근로 인가를 도입했음에도 위기를 겪고 있지만 SK하이닉스는 특별연장근로를 도입하지 않았음에도 전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며 “근로시간을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고 말했다.
신혁진 금속노조 정책부장은 “삼성전자 위기 원인은 기술자들의 경쟁업체 이직으로 인한 기술력 부족 때문”이라며 “반노동적이고 위계적인 기업문화, 사업부 간 갈등, 줄서기 문화, 관리 중심의 인재 평탄화 등 삼성의 구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정책부장은 “반도체 산업은 되는데 조선 배터리 건설 소프트웨어 방산은 왜 안 되겠나”라며 “정부가 규제 예외를 만들면 기업은 예외 대상이 되기 위해 꼼수를 찾고 예외 적용을 위한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진 유니온센터 이사장도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 특례 조항은 노동자를 쥐어짜서 기업의 이윤을 향유하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과로사회로 회귀하는 역사적 퇴행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우 민주당 의원은 “반도체특별법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게 근로시간 문제”라며 “당론은 정해진 바가 없다. 근로시간은 단기간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사회적 대타협을 거쳐야 하는 의제라고 당에선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