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하얼빈’의 세 장면
‘대한독립 만세’를 러시아어로 어떻게 외치느냐고 안중근(현빈 분)이 공부인(전여빈 분)에게 묻는다. 왜 그걸 묻는지 의아해하는 공부인에게 안중근이 말한다. “하얼빈은 러시아 관할지이니 러시아어로 외쳐야 모두가 알아듣지 않겠소.”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안중근은 공부인이 일러준 대로 크게 외친다. “까레아 우라!” “까레아 우라!” “까레아 우라!” 지난해 12월 개봉한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의 한 장면이다.
1910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 재판장 마나베가 피고인 안중근의 최후진술을 제지하며 “의견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말하라”고 경고한다. 안중근은 말한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다시 마나베가 제지한다.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정…” 2022년 출간된 김훈의 소설 ‘하얼빈’의 한 장면이다.
현직 검사장의 거짓과 궤변투성이 주장
그로부터 정확히 115년 후 이 장면이 엉뚱하게도 현직 검사장에 의해 소환됐다. 이영림 춘천지검장이 12일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 올린 ‘일제 치하 일본인 재판관보다 못한 헌재를 보며’라는 제목의 글에서다. 이 지검장은 당시 안중근 의사의 최후진술은 1시간 30분에 걸쳐 이뤄졌고 재판부는 안 의사가 스스로 ‘할 말을 다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할 때까지 안 의사의 주장을 경청했다고 썼다. 그리고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심판을 하면서 피청구인인 대통령이 직접 증인을 신문하는 것을 불허했다며 헌재의 공정성에 시비를 걸었다.
이 지검장의 주장은 적절성을 따지기 이전에 사실관계부터 맞지 않는다는 게 금방 드러났다. 안 의사 재판은 8일 동안 6회, 속전속결로 끝났다. 한국인 변호사 선임조차 불허할 정도로 방어권은 보장되지 않았고, 안 의사 최후진술도 재판부가 경청한 게 아니라 제한했다. 3분 설명 기회 차단 등 헌법재판소 대통령 탄핵심판의 불공정성을 지적한 내용도 모두 언론 팩트체크 등을 통해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역사나 법률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거짓과 궤변투성이 주장을 현직 검사장이 공개적으로 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헌법재판소 행태’ ‘안중근 재판보다 못한 헌재’ 등의 제목으로 이 가짜뉴스는 극우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탄핵반대 진영에 막무가내로 가스라이팅되고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일부 레거시 언론에서조차 팩트에는 눈을 감은 채 그 내용을 중계하는 행태를 보였다.
하얼빈의 세 번째 장면은 앞의 두 장면과는 전혀 다르면서 서로 연결돼 있다. 지난 7일부터 14일까지 제9회 동계아시안게임이 하얼빈에서 열렸다. 115년 전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있었던 기간인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안 의사가 거사한 현장인 하얼빈에서, 안 의사가 꿈꾸었던 동양의 화합과 평화의 제전이 펼쳐진 것은 우연치고는 기막힌 일 아닌가.
대회 폐막을 하루 앞둔 지난 13일은 115년 전 안 의사가 최후진술을 한 5차 공판 다음날이자 사형선고를 받기 바로 전날이었다. 이날 펼친 우리 선수들의 특별한 승전 소식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피겨스케이팅 여자싱글에서 김채연 선수가 세계 랭킹 1위 사카모토 가오리 선수에게 역전 우승했다. 이어 열린 남자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도 차준환 선수가 쇼트에서 9점 이상 앞섰던 가기야마 유마에 대역전극을 펼치며 1위에 올랐다.
‘카레아 우라’ 외친 곳에 울려퍼진 애국가
이날 안 의사가 ‘까레아 우라’를 세번 외쳤던 하얼빈에 애국가가 세번 울려퍼졌다. 세번째 주인공은 스노보드 남자 하프파이프에서 우승한 김건희 선수였다. 예정된 결선 경기가 강풍으로 취소되면서 12일 열린 예선에서 키쿠치하라 코야타 선수에 앞서 1위를 기록한 김 선수가 행운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날 세 금메달이 모두 일본 선수와의 최종 경쟁에서 나온 것 또한 우연치고는 공교롭다.
영화 ‘하얼빈’은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이고 소설 ‘하얼빈’은 30만 부 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극적인 승리를 거둔 우리 선수들이 대견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일본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픈 2025년의 ‘하얼빈’, 이 또한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