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워시의 연준 개혁 그린스펀 시대 꿈꾸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수장을 19년간 지낸 그린스펀이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7년부터 4명의 대통령과 함께한 그린스펀은 높은 경제 성장률과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미국 경제의 최장기 호황을 이끈 인물이다. 연준 대개혁을 목표로 데뷔한 워시 연준 의장이 이상적인 모델로 꼽았을 정도다.
그린스펀은 발언을 자제하고 시장의 판단을 존중하기로 유명했다. 1987년 증시 폭락과 1998년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사태, 그리고 2000년 IT 거품 붕괴의 위기를 극복한 것도 말보다 시장에 강한 신뢰를 준 그의 정책 덕이다. 물론 연준 의장 퇴임 2년 후에 터진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연준의 장기 저금리와 규제완화 탓이라는 언론의 평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시장과 연준의 관계 설정 새롭게 하겠다는 워시의 실험
연준이 시장을 주도하기 어려운 금융정책 변혁기에 의장을 맡은 워시로서는 그린스펀의 지도력을 부러워할 만도 하다. 간결한 발언을 중시하는 워시 스타일은 그린스펀을 빼닮았다. 워시 의장은 첫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서를 100단어 남짓하게 요약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점도표를 연필로 쓴 것이라 지울 수 있다고 직격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시장 스스로 변화를 소화하고 그에 따른 가격 결정 책임을 져야 한다며 연준의 포워드가이던스를 없앤 점도 유사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의장의 시장에 대한 시각은 다르다. 그린스펀은 시장의 든든한 우군이었지만 워시의 의도는 시장의 중앙은행 의존도를 줄이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 사망일인 지난 22일 미국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4.48%까지 상승했다. 30년물 미 국채 수익률도 5%대다. 재정적자 확대에다 인플레이션 위험 등으로 인해 미국 장기금리의 가격 결정력은 이미 시장 몫인 셈이다. 시장은 곧 발표될 근원물가지수를 주시하며 9월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을 예상 중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워시의 첫 회의 진행 스타일을 분석하며 예상과 다를 경우에도 대비하는 모양새다.
지난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한 연준 성명서의 핵심은 3가지다. 기준금리를 동결하되 은행 시스템에 충분한 지급준비금을 공급한다는 게 첫 번째다. 다음은 미국 경제가 중동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에도 꾸준한 확장세를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한마디로 최근 불안한 실업률에도 고용시장의 안정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신호다.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2%를 웃돌고 있으나 공급망 충격으로 인한 것인 만큼 향후 가격 안정조치를 취하면 된다는 게 마지막 메시지다.
워시 의장이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연준 개혁을 위한 5개의 특별 태스크포스다. 첫째 개혁과제가 바로 연준과 시장의 소통 메커니즘을 바꾸는 것이다. 그린스펀 이후의 연준 의장들이 시장과의 소통을 통해 친절하게 전망을 해주던 전통을 끊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이밖에 연준의 대차대조표 정책이나 인플레이션 프레임워크를 비롯해 데이터 활용 방식, 인공지능 등 혁신기술에 따른 변화도 예고했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연준의 목표는 은행 시스템 안정이다. 한마디로 연준의 지급준비금 결정 구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연준의 대차대조표를 과감히 축소할 것이란 시장의 예상과는 다른 셈법이다. 연준 자산 부채를 대규모로 조절하면 기준금리를 관리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대규모 대차대조표 축소는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기술전환을 이루려는 미국 경제에도 불리하다. AI는 풍부한 시중 유동성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경제데이터의 적시성과 신뢰성도 도마에 올린 상태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연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견지하되 데이터 지연이나 수정 등으로 인한 정책 결정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신호다.
AI 분야 생산성 향상 고려해야 하지만 버블 위험 무시해도 안돼
시장은 2%로 유지해온 연준의 물가목표를 조건에 따라 바꿀 수도 있음을 시사한 대목에 주목 중이다. 2020년 8월부터 시행 중인 평균 인플레이션 목표제(AIT)를 수정할 수도 있어서다. 대안은 구간을 정해 물가를 관리하는 방식이다. 2%인 목표물가는 경직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데 반해 1.5~2.5%로 정하면 탄력적 운영도 가능하다는 논리다. 많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구간을 설정한 것도 통화정책의 재량적 운영을 위해서다. 문제는 전쟁이나 기상이변 등 큰 충격에 의한 가격변화를 시장에 온전히 내맡길 수 있을지 여부다. 정보기술(IT) 분야의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호황을 유지한 그린스펀의 금융정책을 따라가는 것은 맞지만 AI 버블 위험을 무시해도 안될 일이다.
현문학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