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닉스’의 코스피 나스닥을 흔들다
한국 메모리 급등락, 일본 유럽 거쳐 미 기술주에 영향 … 레버리지 ETF가 변동성 키워
한국 증시가 미국 나스닥을 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통상 코스피는 전날 밤 뉴욕 증시의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미국 기술주가 오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오르고, 엔비디아가 흔들리면 한국 반도체주도 약세를 보이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순서가 뒤집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급락으로 코스피가 폭락하자 일본과 유럽을 거쳐 미국 기술주까지 매도세가 번졌다. 주식시장 내부의 작은 상품 구조가 대형 종목과 글로벌 지수를 흔드는 이른바 ‘웩더독’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었다
23일 한국 증시는 반도체주 급락에 10% 가까이 밀렸다. 한국 증시 마감 이후 열린 미국 시장에서도 충격은 이어졌다. 나스닥 종합지수는 2% 넘게 하락했고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7%대 급락했다. 마이크론과 AMD 퀄컴 인텔 등 미국 반도체주도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한국 증시가 단순히 지역 시장의 변동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거래 전체를 흔든 것이다. 방아쇠는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전략을 둘러싼 보도였다. 조선비즈는 SK하이닉스가 당초 HBM4로 전환할 예정이던 일부 HBM3E 생산라인 전환을 늦추고 범용 D램 공급 부족에 대응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내용만 보면 반드시 악재라고 보기 어렵다. 범용 D램 가격이 급등하면서 HBM보다 수익성이 더 좋아졌고, SK하이닉스가 이미 HBM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한 만큼 생산능력을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에 배분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문제는 해외 투자자들이 이를 다르게 읽었다는 점이다. AI 서버와 엔비디아 차세대 칩 투자에 대한 기대가 워낙 높았던 상황에서 HBM4 생산 전환 속도조절은 곧바로 AI 수요 둔화 우려로 번졌다. 특히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칩 ‘루빈’ 생산 전망이 낮아지고 있다는 해석까지 붙으면서 시장은 SK하이닉스의 전략 조정을 메모리 반도체 호황의 정점 신호로 받아들였다. 한국 반도체주 하나의 생산계획 변화가 AI 인프라 투자 전체의 지속성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현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한국 증시의 위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더 이상 한국 대표 수출주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AI 서버의 핵심 부품인 메모리 반도체 가격과 공급능력을 보여주는 글로벌 가격 발견 자산이 됐다. HBM은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함께 AI 데이터센터 투자의 핵심 병목으로 꼽힌다. 범용 D램 역시 서버와 PC, 스마트폰 전반에 들어가는 기초 부품이다. 한국 메모리주가 흔들리면 투자자들은 단순히 한국 기업 이익을 다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AI 투자 사이클 전체를 다시 점검한다.
레버리지 상품, ETF가 주가 흔드는 구조
여기에 레버리지 ETF가 낙폭을 키웠다. 블룸버그통신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추종하는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가 하락장에서 대규모 매도 물량을 내놓으며 주가를 더 압박했다고 분석했다. 원래 ETF 가격은 기초자산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레버리지 상품은 기초자산이 급락하면 장 마감 전후로 포지션을 줄여야 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기초자산 매도가 늘어난다. 주가가 ETF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ETF가 주가를 흔드는 구조가 된 셈이다.
개인투자자의 신용거래도 불안을 키웠다. 올해 한국 증시가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급등하면서 빚을 내 투자하는 수요가 늘었고, 일부 은행권 신용대출도 빠르게 증가했다.
골드만삭스는 한국 금융당국이 레버리지 ETF의 증거금 상향, 투자자 교육 강화, 거래비용 인상, 일시적 거래 제한 같은 안전장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상승장에서는 레버리지가 수익률을 키우지만, 하락장에서는 매도를 강제하는 압력으로 바뀐다. 이번 급락이 단순한 주가 조정이 아니라 포지션 청산의 성격을 띤 이유다.
미국 시장도 이미 취약했다. 엔비디아 마이크론 AMD 같은 종목은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 기대를 타고 급등했고, 투자자들은 AI 인프라 병목에 노출된 기업을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한국 증시 급락은 이 과열된 거래의 약한 고리를 건드렸다. 미국 기술주가 한국 때문에 무너졌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더 정확히는 한국발 충격이 이미 과도하게 쌓여 있던 AI 반도체 포지션 청산의 방아쇠가 됐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일본 증시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일본은 직접적인 HBM 생산국은 아니지만 반도체 장비와 소재, 전자부품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국 반도체주 급락 이후 일본 기술주와 대만 반도체주도 함께 흔들린 것은 아시아 증시 전체가 미국 AI 투자 사이클에 깊게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VKOSPI 급등에 주목
금융정보 사이트 마켓이어는 한국 증시 변동성 지수인 공포지수(VKOSPI) 급등에 주목했다. VKOSPI 상승은 투자자들이 단순한 하루짜리 낙폭보다 앞으로의 가격 흔들림 자체에 더 높은 보험료를 지불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이 더 이상 작은 신흥국 시장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모건스탠리(MSCI) 신흥국지수에서 한국 비중은 20% 안팎으로 커졌고, 대만과 함께 AI 반도체 사이클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축이 됐다. 한국 증시가 흔들리면 신흥국 펀드와 ETF의 리밸런싱 압력도 함께 커질 수밖에 없다.
다만 과거 사례를 보면 한국 증시의 급락은 대체로 깊지만 짧았다. JP모건에 따르면 2024년 7월 코스피는 20.6% 하락한 뒤 40일 만에 회복했고, 2026년 3월에도 19.8% 밀린 뒤 15일 만에 반등했다. 2026년 6월 조정도 14.9% 하락했지만 회복 기간은 7일로 집계됐다. 반도체 사이클이 훼손되지 않고 D램 가격 상승과 AI 서버 투자가 이어진다면 이번 조정 역시 빠른 반등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번 조정 이후 관건은 코스피가 하루 이틀 기술적으로 반등하느냐가 아니다. 골드만삭스가 짚은 것처럼 시장이 확인해야 할 변수는 더 구체적이다. 먼저 AI 반도체 거래의 투자심리가 회복돼야 한다. SK하이닉스의 HBM4 생산 속도조절 보도가 실제 수요 둔화 신호인지, 아니면 범용 D램 수익성 개선에 따른 생산 배분 조정인지가 분명해져야 한다. 메모리 가격 상승과 엔비디아 차세대 칩 수요가 유지된다면 이번 급락은 과열 해소에 그칠 수 있다. 반대로 HBM 정점 논란이 확산되면 한국 증시는 글로벌 AI 랠리의 선행 조정 시장으로 남게 된다.
두번째 변수는 레버리지다. 금융당국이 레버리지 ETF 안전장치를 검토하는 것은 이번 급락이 단순한 기업 실적 우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5대 시중은행의 신용대출 등 기타대출 잔액이 관리 목표를 넘어선 상황에서 대출 기준까지 조여지면 개인투자자의 매수 여력도 약해질 수 있다. 주가가 오를 때는 개인의 레버리지가 상승을 밀어 올리는 연료가 됐지만, 하락장에서는 같은 레버리지가 매도를 강제하는 압력으로 바뀐다.
세번째는 외국인과 연기금 수급이다. 골드만 보고서에서 가장 불편한 대목은 외국인과 국내 기관이 팔고 개인이 받아내는 흐름이다. 한국 증시가 MSCI 신흥국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만큼 외국인 매도는 국내 시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글로벌 신흥국 펀드와 ETF의 리밸런싱, AI 반도체 포지션 축소, 원화 약세 압력이 동시에 맞물릴 수 있다. 여기에 국민연금 등 장기 기관의 기계적 매도 부담이 남아 있다면 반등은 가능해도 추세 복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지막 변수는 제도 신뢰다. MSCI가 한국을 선진국지수 관찰대상국에 올리지 않은 것은 단기적으로 수급 악재에 그치지 않는다. 역외 원화시장 부재와 공매도 결제 관련 운영상 마찰 등 시장 접근성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한국 증시가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시장으로 커졌다면 그에 맞는 시장 인프라와 투자자 신뢰도 함께 필요하다.
저가매수보다 급락의 조건부터 확인해야
따라서 이번 급락은 저가매수 여부보다 조건 확인의 문제로 봐야 한다. AI 수요가 유지되고, 레버리지 ETF 매도가 잦아들며, 외국인과 연기금의 기계적 매도 압력이 줄고, 제도 개선 기대가 되살아날 때 코스피 반등은 더 설득력을 얻는다.
반대로 이 조건들이 풀리지 않으면 한국 증시는 글로벌 AI 랠리의 수혜주이면서 동시에 그 랠리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매도되는 시장이라는 양면성을 계속 안게 된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