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시장 경쟁 격화…감사보수 평균 30% 하락
외부감사인 ‘지정감사 → 자유선임’ 기업들
“감사보수, 회계개혁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
감사품질 하락 우려, 금융당국 대응책 고심
지난 3년간 금융당국으로부터 외부감사인을 지정받았던 대형 상장사들이 올해 대거 외부감사인을 자유롭게 선임할 수 있게 되면서 회계법인들이 격렬한 수임 경쟁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 회계법인인 빅4(삼일 삼정 안진 한영)들의 지나친 출혈경쟁으로 지정감사에서 자유선임으로 바뀐 기업들의 평균 감사보수가 크게 하락했다. 주기적 지정제는 6년간 상장 기업 등이 외부감사인을 자유롭게 선임했다면 이후 3년은 금융당국이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3년 이후에는 다시 자유롭게 선임할 수 있다.
4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한국공인회계사회는 12월 결산법인들이 제출한 감사보수 계약을 바탕으로 통계 분석을 진행하고 있으며 3년간 금융당국이 외부감사인을 지정하다가 올해부터 기업이 감사인을 자유 선임한 기업들의 경우 감사보수가 전년 대비 평균 30% 가량 떨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기적 지정감사 대상에서 올해 자유선임으로 풀린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은 30여곳에 달한다. 올해 감사시장은 빅4들이 대격전을 벌였다는 게 회계업계의 평가다.
◆회계사 대폭 늘렸지만 일감 줄면서 ‘수임 전쟁’ = 회계 개혁으로 기업들의 외부감사가 강화되면서 회계업계는 빅4를 중심으로 회계사들을 대거 채용하고 급여도 대폭 올려줬다. 주기적 지정제와 표준감사시간제 시행으로 감사 인력이 많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기적 지정제 이후 자유선임으로 풀리는 기업들이 늘고, 표준감사시간의 탄력 적용 등으로 필요 감사 수요가 줄었다. 여기에 금융당국이 자산 1000억원 미만 상장사에 대해 내부회계관리 감사의무를 면제하고, 자산 2조원 미만 기업들의 연결 내부회계관리 외부감사를 5년간 유예함으로써 빅4의 외부감사 인력들의 업무가 감소했다.
감사 인력을 크게 늘린 빅4들은 일감이 감소하면서 출혈 경쟁을 벌여서라도 외부감사 업무를 수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특히 빅4 중에서 1·2위를 다투는 삼일과 삼정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3·4위를 놓고 안진과 한영이 혈투를 벌이면서 감사 시장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다.
빅4들이 상대방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것뿐만 아니라 중견·중소 회계법인 시장까지 뛰어들었다.
A증권사의 경우 지정감사에서 자유선임으로 풀리면서 치열한 수임 경쟁이 벌어졌고 전년 대비 감사 보수가 60% 가량 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적으로 감사보수가 높은 금융기관들을 상대로 한 수임 경쟁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는 후문이다. 삼일회계법인의 경우 지난해 새롭게 금융부문 대표를 신설하면서 내부 경쟁도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쟁이 격화된 것에 비해 실제 다른 회계법인의 고객을 빼앗아 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는 평가다. 출혈 경쟁이 대다수 회계법인들에게는 수임 단가만 낮추는 결과를 초래해 독이 됐다는 것이다.
대형 회계법인 관계자는 “과연 누굴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라며 “다른 회계법인이 수임료를 낮춰서 제시하면 기업들은 원래 관계를 맺고 있는 회계법인한테 다른 곳에서 가격을 이렇게 제안하는데 수임료를 낮출 수 없느냐고 말해서 결국 수임료를 낮춰서 계약을 하는 곳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이 외부감사 일감을 더 많이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감사 보수가 회계 개혁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빅4 치고 들어오면서 감사시장 난장판” = 빅4들의 출혈경쟁에 중견·중소회계법인들의 불만도 크다. 한 중견 회계법인 대표는 “대형 회계법인들이 치고 들어오면서 감사시장이 난장판이 됐다”며 “빅4들이 30~40% 정도 가격을 덤핑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감사 시장이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질지는 몰랐다”며 “다들 황당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견회계법인들은 지정감사제도 변화에 따라 지정감사 건수가 줄어들면서 2023년 이후 타격을 받았다. 이번에 빅4들의 수임 경쟁으로 또 한 차례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치열해진 감사 시장 경쟁은 경기 침체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기업들의 경영 악화로 빅4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컨설팅 분야에서 일감이 급감했다. 비교적 일감이 안정적인 감사 시장에서 실적을 올리려는 움직임이 커졌고, 기업들이 경비 절감 차원에서 외부감사 보수를 낮추려고 하는 경향과 맞물렸다.
금융당국은 감사 보수가 크게 낮아지면서 감사품질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회계법인들의 지나친 출혈경쟁이 감사품질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지난 2022년 회계학연구에 실린 ‘감사시장의 경쟁과 감사의견구매’를 주제로 한 논문에서는 감사시장의 경쟁 수준이 낮을수록 기업의 감사의견구매 현상이 줄어든다는 실증적 연구결과가 실렸다. 감사의견구매 현상은 기업이 적정 감사의견을 받을 목적으로 감사인을 선택하는 기회주의적인 의사결정 행위를 말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올해 감사계약이 어느 정도 가격과 감사 투입시간으로 해서 설정이 됐는지 분석을 해서 대책을 강구해야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며 “가격 경쟁을 당국에서 섣불리 건드리면 공정거래 문제로 불거질 수 있어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고, 회계업계와 학계의 의견을 다양하게 듣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자유선임 시장에서 가격 경쟁 중심이 아니라 감사품질 위주로 수임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한편 올해 회계법인들의 경영실적이 크게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인건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회계법인들의 경영 구조상 인건비 조정 등으로 재무제표에서 적자를 낼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파트너 성과급이 대폭 줄어드는 등 실질적인 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