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회계개혁 물거품 만드는 출혈경쟁
“지정감사를 받기 전보다 감사보수가 더 깎인 곳도 있는데 정말 미친 짓이 벌어졌다.” 지난달 12월 결산법인에 대한 감사계약이 끝난 후 회계업계 관계자 입에서 나온 한탄이다.
금융당국이 3년간 기업의 외부감사인을 지정해주는 ‘주기적 지정제’는 회계개혁으로 탄생한 대표적 제도다.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지만 그만큼 감사 독립성이 절실하다고 내린 극약처방이다.
하지만 올해 대형회계법인(빅4)을 중심으로 지정감사가 끝나면서 자유선임으로 풀린 기업들을 상대로 한 출혈경쟁이 회계시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정감사는 회계법인간 수임경쟁이 없다는 점에서 감사보수가 다소 높게 책정되고, 수임부담이 없는 회계법인들은 기업 눈치를 보지 않고 강도 높은 감사를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정감사가 풀린 기업들의 감사보수가 지정감사 이전보다 낮아지는 출혈경쟁으로 감사 시장은 회계개혁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재계의 강한 반발을 물리치면서 지켜온 회계개혁을 회계업계 스스로 걷어차 버린 셈이다.
시장교란 행위로까지 비판받는 빅4의 출혈경쟁에 대해 금융당국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브레이크를 걸지 못했다. 한 회계법인의 대표회계사는 “실적경쟁이 불붙으면서 대표들이 말린다고 해서 말을 듣는 상황이 아니게 됐다”고 말했다.
빅4의 출혈경쟁은 지정감사에서 자유선임으로 풀린 기업들에 대한 수임경쟁뿐 아니라 다른 감사영역으로도 확대됐다. 학교법인에 대한 교육부 감사는 통상 회계법인을 선임해 공동으로 진행하는데, 그동안 중견·중소회계법인들이 맡아온 시장에 빅4가 들어오면서 감사보수를 대폭 낮췄다.
감사를 받는 입장에서는 적은 비용을 투입하는 게 좋을 수 있지만 감사보수가 줄어들면 감사에 투입되는 인력과 시간이 감소할 가능성이 높고 감사품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올해 출혈경쟁은 감사시장 전반의 보수를 낮추는 악영향을 미쳤다. 감사보수가 10~20% 정도 낮아진 곳도 있지만 많게는 60%까지 줄어든 기업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은 평균 30% 가량 하락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중견·중소회계법인들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회계업계 전반의 감사품질 향상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감사품질 제고를 위해 시스템 개편 등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매출감소로 여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감사품질을 고려하지 않은 현재의 가격경쟁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지만 당장 내놓을 대책이 마땅치 않다.
먼저 회계업계 스스로 이번 사태가 초래한 결과를 되돌아보고 감사시장 정상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경기 재정금융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