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트럼프-젤렌스키 설전에 대한 단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백악관 정상회담장에서 벌인 거친 설전은 양면적인 단상(斷想)을 불러일으킨다. 통상 봐오던 익숙한 정상회담 장면이 전혀 아니었다. 실무진의 치밀한 조율을 거친 뒤 정상들은 카메라 앞에서 상호간 이견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고 부드러운 ‘외교적 수사’로 포장해 연출하는 게 관행이었으나 이날 회담은 정반대였다. 정상간 거친 고성과 날선 말싸움 뒤 예정됐던 오찬을 겸한 비공개회담과 광물협정 서명, 공동기자회견은 취소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점심도 거른 채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설전 장면’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감상은 트럼프식 ‘미국우선주의’가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강대국 중심의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과 ‘약소국의 비애’였다. 미국 앞에 서면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이기에, 더욱이 머잖아 ‘관세폭탄 방위비압박’ 등 트럼프의 일방적 파상공세가 예고돼 있기에 ‘을’의 입장에서 동병상련 감정이입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그에 겹치며 더 절실히 와 닿은 것은 젤렌스키의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이었다. 인접한 강대국 러시아와 극심한 갈등을 불사하며 충돌하다가 조국에 전쟁참화를 불러들여 100만 사상자와 국민고통을 안기고 상당한 영토를 침탈당했다.
‘미국우선주의’에 치인 약소국 처지와 전쟁참화 불러들인 무모한 지도자
정상회담 설전을 간략히 톺아보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사전조율’을 통해 종전협상 구상을 굳힌 트럼프에게 젤렌스키는 확실한 안전보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트럼프는 자신의 종전구상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젤렌스키를 거칠게 면박했고 밴스 부통령까지 가세해 조리돌림 하듯 몰아붙였다.
트럼프는 “당신은 (손에 쥔) 카드가 없다” “당신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갖고 도박하고 있고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도박하고 있다”고 압박했다. “당신 국민이 죽어간다. 병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당신은 ‘종전을 원치 않는다’고 되풀이 말한다. 타협하지 않으면 우리는 빠질 것이고, 우리가 빠지면 아무런 카드도 없이 끝까지 싸워야 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젤렌스키 입장에선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우크라이나전쟁 판세는 이미 러시아의 압도적 우세로 기울어져 회복불능 상태이고, 미국이 손을 떼면 얼마나 더 버틸지 알 수 없는 위급상황이다. 패색 짙은 소모전에 지친 국민들은 ‘이제 그만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여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다. 국민인기도 떨어져 불화로 경질시킨 잘루즈니 전 군총사령관에게 뒤지는 것으로 전해진다. 무엇보다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정해진 임기가 이미 끝났는데도 대통령선거를 치르지 않으면서 국민불만이 쌓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은 젤렌스키 입장에 동조하며 말로는 더 많은 역할을 약속하면서도 실질적 힘이 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이 알아서 하라’는 트럼프의 냉담한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면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트럼프가 전통적 우방인 유럽을 제치고 푸틴과 접촉하면서 ‘대서양동맹’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며 러시아와 소통하는 것이 현실적이며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는 트럼프의 판단은 향후 세계질서의 격변을 예고하는 근본적 대전환이다.
격변하는 세계질서 속 대북정책과 미중러일 외교 근본적으로 바꿔야
이러한 상황 전개는 지정학적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연계돼 있는 우리 안보와 외교에 중대한 시사점을 준다. 바이든 전 대통령의 ‘가치중심 진영외교’에 올인한 윤석열 대통령은 러시아제재에 앞장서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과 파병까지 검토하는 등 편향된 선택에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러시아와 준군사동맹을 맺었다. 중국과의 불화도 깊어져 경제적 손실은 물론 대북한 안보지렛대마저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지정학적 특성을 살려서 주변국들과 두루 좋게 지내며 국익을 챙기는 ‘균형실리외교’가 긴요함을 그토록 강조했건만 메아리는 없었다.
거래적 접근을 선호하는 트럼프식 세계관은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자칫 동맹인 우리를 건너뛰고 직거래하는 상황까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차기정부는 미국의 핵우산정책을 포함해 윤석열이 송두리째 망쳐놓은 대북정책과 미중러일 외교를 복구하는 데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