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규 칼럼
트럼프가 벌어준 시간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미국이 국익보다 세계질서를 너무 자주 우선시하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자국에 가장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해 왔다”고 말함으로써 이제 미국은 국제질서를 우선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이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서도 “세계에 단순히 일극 세력만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전후 세계질서를 미국이 단일 패권을 갖는 단극(unipolar)체제에서 다극(multipolar)체제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종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다극체제로의 전환이 갖는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놀랍게도 이 다극에 유럽이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는 다극은 미국 중국 러시아다. 이 다극 가운데 미국은 러시아와 손잡고 중국을 견제할 것이라는 그림이 읽힌다. 미국이 미중수교에서 냉전종식의 계기를 찾으려 했다는 해석에서 보면 기시감을 느낄 만하다. 다만 이번에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손잡을 대상이 러시아가 되었을 뿐이다. 2월 2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진 이유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러시아와 손잡기로 한 이상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하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다극체제의 세계질서 선언한 트럼프
미국이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있는 세계질서의 변화는 한국경제에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중간의 갈등, 종잡기 어려운 관세정책, 거친 언행이 불러오는 불안, 관세와 물가간의 정책 상충 등으로 인한 불확실성 등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트럼프는 한국 제조업의 제2 전성기를 열어주고 있다. 이미 삼성전자조차 중국에 대한 기술우위를 의심받고 있는 상황, 그리고 중국 전기차의 약진 등 중국에 대한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이 이미 진행중인데 트럼프가 시간을 벌어주었다.
우선, 러-우 전쟁 종결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에 거대한 재건시장을 열어준다. 한국건설업은 이 두 시장에 다 들어갈 수 있다. 한국은 러시아가 설정해둔 레드라인 즉 살상무기의 제공이라는 선을 넘지 않았다. 이제 러시아가 한국이 설정해 둔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주면 한-러 관계는 급속히 회복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우주, 첨단기술의 이전인데 러시아가 구두로라도 그것에 어떤 선을 지켰다고 확인만 해주면 되는 일이라 어려울 것이 없다. 더구나 러시아는 중국의 제조업에 대한 종속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은 그럴 우려가 없다.
다음으로 미국이 유럽에서 군사비를 빼내 동북아시아로 옮겨오기로 했고(트럼프는 그 차액을 유럽이 스스로 지불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군사비 지출의 핵심 항목은 해군력 복원에 있다는 점은 여러차례 밝혀졌다. 그에 필요한 예산으로 30년간 1조750억달러라고 분석해 두었다. 미국과 중국간 군함수는 이미 역전됐고 그 차이는 갈수록 커진다는 점에서 미국의 불안을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원하는 속도로 군함을 건조할 조선소가 미국에 없다. 2024년 전 세계 조선 수주량을 보면 70%가 중국, 16~17%가 한국, 4%가 일본이다.
트럼프의 물가대책은 알래스카의 유전과 액화천연가스(LNG)전 개발을 중요 축으로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 일본 등 주요 대미 무역흑자국에 미국산 석유와 LNG 수입을 요구할 것이고, LNG운반선과 유조선에 대한 수요는 폭증할 수밖에 없다. 중국 조선업에 대한 견제정책을 착착 진행중인 미국발 상선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도 한국뿐이다. 미중갈등으로 인한 물동량의 감소분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국의 주요 건설사는 한미 에너지 동맹을 축으로 삼아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가 원전시공능력을 잃은 이상 한국의 건설업은 이제 원전업이기도 하다.
미국의 빅테크들이 구상하는 해저 케이블망의 대대적 확충, AI시대를 맞아 노후화된 미국 전력망의 재구축은 한국의 전력 및 전선산업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것이다. 연관산업으로 예를 찾자면 한이 없다. 의심스러우면 ‘국장탈출’이라 불리는 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당선 이후 주가가 2배 이상 오른 종목만 찾아보자.
트럼프 리스크와 기회 함께 살펴야
미국이 중국 제조업의 확장을 안보 차원에서 경계하는 순간 그 대체국은 한국뿐이다. 트럼프 구상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오만함을 경계하는 것과 함께 트럼프 리스크와 찬스를 균형 있게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함께 오는 법이라 지 않는가. 문제는 한국경제의 위기와 기회가 편중되거나 양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는 자영업을 필두로 내수와 소비에 집중되고 기회는 수출 제조업에 집중되고 있다. 이렇게 분리된 위기와 기회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데 정치가 멈춰 섰다. 트럼프가 벌어준 시간은 매우 짧을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