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그래도 동네는 돌아간다

2025-03-06 13:00:07 게재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대통령 한명 잘못 뽑은 죄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트럼프발 관세전쟁이 수출기업들을 짓누르고, 끝이 언제일지 모를 내수부진은 골목경제 숨통을 죄고 있다. 나라마다 첨단기술 경쟁에 총력전인데 리더십이 실종된 대한민국은 집안 건사에도 힘이 부친다.

그런데 희한하다. 정부는 제구실을 못하는데 동네는 별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청소차도 돌고 눈이 오면 제설도 이뤄진다. 도서관도 체육관도 예정대로 지어진다. 일상활동뿐 아니다.

이 와중에 혁신도 일어난다. 성동구에선 대학가 월세가 하락 안정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주요 대학가 월세가 지속 상승하는 와중에 올 1월 기준 전년 동월 대비 5.0%나 떨어졌다. 구가 나서서 대학 기숙사 신축을 반대하던 주민을 설득한 덕분이다. 원룸 임대로 생계를 잇는 주민들 입장을 반영해 공실 문제 대안을 마련했고 학생들은 타 지역 원룸 시세 절반 가격에 살 집을 찾게 됐다. 임대업을 하는 주민과 학생들 간 볼썽사나운 다툼이 상생해법을 찾은 것이다.

서초구에선 휠체어 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는 ‘배리어프리 키오스크’가 확산될 전망이다. 구가 장애인·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고려해 소상공인 점포에 구매 지원을 결정하면서다. 그간 장애인 단체들은 손이 닿지 않아 휠체어 장애인이 사용할 수 없는 키오스크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관련법이 만들어졌지만 영세한 소상공인들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 설치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작은 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지자체의 관심이 양쪽 모두를 웃게 만든 사례다.

은평구는 노인들을 위해 공공건물 한켠을 내줬다. 새로 지은 동주민센터에 실내파크골프장을 만든 것이다. 파크골프는 요새 노인들 사이 최고 인기 운동이지만 골프장 만들 곳이 없던 은평구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했고 실내 파크골프장이란 묘안을 찾아냈다. 경기장이 없어 멀리까지 다니던 어르신들은 이제 단돈 2000원만 내고 집 근처에서 파크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동네가 문제없이 돌아가는 건 선출직 단체장들이 주민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민의 감시와 견제로부터 가까이 있는 권력은 딴짓을 하기 어렵다. 동네 어르신들은 “관선 시대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요사이 정치권에선 분권 논의가 한창이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축소하자는 게 주제다. 하지만 정부와 별개로 동네가 문제 없이 돌아가는 오늘의 대한민국 풍경을 볼 때 권력구조 개편보다 중요한 논의는 ‘지방’과 ‘지자체’의 역할을 제고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란사태로 대통령실과 중앙정부의 역할에 의심이 드는 지금, 자치와 분권의 소중함을 새삼 되새겨본다.

이제형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