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수요 급증에 노후원전 수명연장 러시

2025-03-07 13:00:02 게재

탈탄소 목표 달성, AI발 전력수요 급증 … FT “각국, 노후뿐 아니라 폐쇄원전도 재검토 움직임”

영국 스코틀랜드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토네스 원전은 노후화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우라늄 연료봉을 감싸는 흑연 벽돌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벽돌을 교체하기란 극히 어렵기 때문에, 엔지니어들은 정기적으로 현미경 카메라를 원자로에 내려 방사선에 의한 마모를 모니터링한다. 지진 등 재해 발생시 균열로 인해 원자로의 안전 정지능력이 불능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다. 이 원전 소유주는 발전량 기준 세계 1위 전력사인 프랑스 EDF다. 1988년 개장한 이 원전은 최소 2030년까지 운영될 전망이다. 발전소 책임자인 폴 포레스트는 “안전에 자신 있다. 하지만 흑연 벽돌 검사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여준다면,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일 토네스 원전 사례를 소개하며 “전세계 각국이 저탄소 전력 수요 증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존 원전에서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FT에 따르면 전세계 가동중인 원전 약 400개가 1970~1990년대 건설됐다. 40년이라는 예상 수명 또는 최초 허가기간이 속속 끝나가고 있다. 하지만 원전 발전은 절실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 전력 수요가 현재 대비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전세계 각국이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등 전력소모가 큰 미래산업에 국운을 걸면서 전력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빠듯한 시간과 예산으로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는 것보다 기존 노후·폐쇄 원전의 일반적인 수명을 연장하려 한다. MIT 에너지·환경정책 연구센터의 존 파슨스 교수는 “우리는 전력이 필요하다. 노후원전 수명 연장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목록에서 꽤 빠른 순위에 있다”고 말했다.

IEA에 따르면 미국에 있는 30년 이상 된 모든 원전이 20년 추가 라이선스를 신청했다. 바이든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력기업들은 폐쇄된 원전을 다시 가동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1963년 이후로 노후화나 사고, 정치적 반대, 셰일오일 붐 등으로 폐쇄된 원전은 약 217기에 달한다. 그중에는 1979년 붕괴사고 등으로 2019년 최종 폐쇄된 쓰리마일섬 원전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20년간 전력공급계약을 체결한 미국 전력기업 콘스텔레이션 에너지는 2028년 쓰리마일 원전을 다시 가동할 계획이다. MS는 ‘크레인 클린에너지센터’로 개명한 이 원전에서 1메가와트시당 110~115달러에 전력을 공급받게 된다.

각국, 원전 정책 속속 전환

프랑스는 유럽연합(EU)에서 가장 큰 원자력 발전국이다. 마크롱정부는 2022년 ‘2050년까지 최대 14개, 총용량 25기가와트 규모의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밝혔지만 상황은 지연되고 있다. 지난해 말 프랑스 북서부 플라망빌에 57번째 원자로가 가동을 시작했지만, 당초 예정보다 12년 늦어졌다. 프랑스 감사원에 따르면 총비용도 237억유로(약 37조원)로 대폭 늘었다.

프랑스 감사원은 최근 원전 수명연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2040년 원전 발전용량이 현 수준 대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국영 EDF는 원전 운영기간을 60년 이상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연구중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54기 원전을 모두 폐쇄한 일본도 정책을 전환중이다. 현재 14개의 원전이 재가동되고 있다. 일본정부는 또 8개 원전에 총 60년 동안 가동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당초 제한기간보다 20년 늘어났다. 그동안 가동하지 않은 시간은 제외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독립조사위원회를 이끌었던 도쿄대 교수 스즈키 가즈토는 “일본이 탈탄소화를 이루고 에너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원자로를 60년 이상 사용해야 한다”며 “노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기술과 안전에 대한 과신이 문제”라고 말했다.

2035년까지 원전을 완전히 폐쇄한다는 계획을 고수하고 있는 스페인에서도 반발이 드세다. 특히 2027년 알마라즈 원전의 첫번째 원자로 폐쇄가 다가옴에 따라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스페인 에너지기업 ‘이베르드로라’와 ‘엔데사’ 최고경영자들은 지난 2년 동안 원전의 단계적 폐쇄 계획에 대한 재검토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베르드로라 CEO 이그나시오 갈란은 “최소한 우리가 왜 다른 나라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열린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총선에서 승리한 기독민주당 대표로 차기 총리가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도 각종 에너지 위기 속에서 원자력 발전을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한 올라프 숄츠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기존 발전소를 더 오래 가동하는 것이 새로운 발전소를 짓는 것보다 쉽다. 미국 원전기업 웨스팅하우스의 장기운용 부문 대표 루카 오리아니는 “현재 우리는 최소 80년 동안 원전을 운영할 수 있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며 “80년에서 100년으로 20년을 더 연장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원전 효율성을 개선해 전력 생산량을 늘릴 수도 있다”고 장담했다.

IEA는 “노후원전 연장 비용을 1킬로와트당 500~1100달러로 추정하고 있다”며 “이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풍력·태양열과 가격경쟁을 벌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MIT 파슨스 교수도 “일반적으로 원전 수명연장에 대한 투자는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발전방식에 투자하는 것보다도 저렴하다”고 말했다.

저렴하지만 안전 리스크 커

하지만 상업적 전망엔 리스크가 있다. 노후원전은 생산량 조절이 쉽지 않다. 때문에 풍력·태양광 발전량이 많은 지역에서 경합할 경우 전기료를 낮출 수밖에 없어 적자를 보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원자력기술개발·경제 부문 책임자인 다이앤 카메론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전력시장을 잘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달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AI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을 공개한 이후 주요 에너지기업 주식이 폭락한 바 있다. 이를 ‘AI발 전력수요 급증’이 예정된 미래상은 아니라는 신호로 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서식스대 폴 도프만 교수는 “원전이 진짜 필요한가, 전력수요 예상이 현실적인가, 그렇다면 원전 수명연장이 옳은 방법인가 등 의문이 든다”며 “수명이 연장되는 원전들은 오늘날에는 지어지지 않는 구식모델이다. 전기차가 필요한 시대에 옛날 포드차를 타려고 노력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도 노후원전에 큰 위협요소다. 프랑스 EDF는 최근 수년 동안 여러 원전의 전력생산량을 일시적으로 줄여야 했다. 예상치 못한 폭염으로 원자로를 냉각하는 데 사용하는 강물 수위가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EDF는 기온상승으로 인해 강 유역이 건조해질 수 있는지, 기후변화로 해수면 상승이나 지진, 토네이도의 위험이 있는지를 면밀히 평가하고 있다.

FT는 “노후원전이나 폐쇄 뒤 재가동에 돌입하는 원전에 의존하는 건 필연적으로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강력한 규제체제를 마련해 이같은 위험을 제대로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원전참사를 겪은 일본은 신중한 행보를 기하고 있다. 도쿄대 스즈키 교수는 “2011년 이후 일본정부는 원전과 관련한 의사결정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일본정부는 지난해 11월 쓰루가 원전 2호기의 재가동 신청을 안전성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며 반려했다”고 말했다.

노후원전 수명연장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결국은 맞이해야 할 폐쇄에 대한 준비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프랑스 원자력안전당국의 부국장 줄리앙 콜레는 “프랑스에서 노후원전을 계속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큰 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원전의 수명이 다하는 시기를 예상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전력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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