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양심이 사라졌다
조선시대 지배층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 염치(廉恥)다. 체면을 차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이 염치는 조선왕조실록 국문판에 2067번 등장한다. 예의와 염치가 사라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경고도 158번이 나온다. 조선왕조를 518년 지탱한 정신적 지주이다.
성종실록에 “선비라는 자가 염치가 없으면 그 다음을 볼 것도 없다”는 구절이 있다. 광해군도 염치를 강조했다. 즉위 원년에 “염치가 있는 사람을 기용할 수 없다면 기용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염치가 없는 무리들일 것”이라고 간파했다.
을사오적의 공통점은 몰염치와 파렴치
그런 점에서 보면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한 이유도 염치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을사오적의 공통점이 몰염치와 파렴치 아닌가. 나라보다 자신의 이득을 우선하지 않았나. 이 염치를 요즘 말로 하면 양심(良心)쯤 될까.
생태학자 최재천 박사가 지난 1월 14일에 펴낸 책 제목이 '양심'이다. 그는 우리 일상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단어의 사멸은 용도가 폐기되거나 다른 표현으로 대체될 때 발생한다. 그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출세하는 세상에서, 양심이 밥 먹여 주느냐 비아냥거리는 사회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급속히 효용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진단했다.
사실 양심은 철학적으로 어려운 주제다. 이를 노벨상 수상작가 한 강이 '소년이 온다'에서 양심을 “내 안에 깨끗한 무엇”이라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군인의 총부리보다 더 강한 게 양심”이라고 했다. 12.3 비상계엄과 관련된 군인들의 ‘양심선언’과 얼핏 겹쳐 보인다.
양심에 대한 세속적 고찰도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은 양반이고, 피지배층은 양민이다. 같은 ‘양’이지만 한자가 양반(兩班)과 양민(良民) 다르다. 이런 점에 착안해 양반은 양심(兩心), 즉 두 마음으로 살고 양민은 어진 마음 양심(良心)으로 산다고 지적한다.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합친 명칭으로 요즘으로는 ‘육법당’에 이어 법대 출신 문반과 육사 출신 무반의 결합쯤 아닐까.
양심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기제다. 1883년 출간된 가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을 꿰는 주제가 바로 양심이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쑥쑥 자라는 피노키오는 거짓말 한번이 많은 거짓말을 만든다는 걸 깨닫는다. 목각인형은 “항상 양심이 삶의 안내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2022년에는 피노키오 출생 140년을 맞아 할리우드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공개한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고 제작비도 3500만달러나 들였지만 수익은 고작 10만9846달러에 그쳤다.
한국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피노키오'로 개봉해 관객수 6354명을 기록했다. 양심이 사라진 시대, 양심이 불편하고 비양심이 판치는 세태를 반영한 것일까.
최 박사는 '양심'에서 “차마, 어차피, 차라리”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인간으로서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나서겠다”며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한 배경을 설명했다. “모든 사람을 속여도 절대 한 사람만은 속일 수 없다.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거다.
윤석열 내놓고 봐주는 후안무치
과연 그럴까. 요즘의 일부 공직자들은 얼굴 표정도 안 바꾼다. “차마 인연을 저버리지 못하고, 어차피 내가 처리해야 한다면, 차라리 화끈하게 밀어주겠다”고 나서는 듯하다. 양심(良心)이 아니라 양심(兩心)으로 말이다.
예컨대 최상목 대통령권한대행은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결정했는데도 마은혁 재판관의 임명을 거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 대행이 마 재판관의 성향을 친윤으로 판단했다면 빛의 속도로 임명했을 것이라고 비난한다. 사실이면 공직의 엄정함과 양심보다 개인적인 보은 차원으로 국정을 처리하는 것 아니겠나.
구속기간은 날(日)로 규정돼 있는데 때(時)로 계산한 판사도 의혹을 받고 있다. 71년간의 관례를 깨고 새로운 판례를 굳이 내란죄 혐의로 기소된 윤 대통령에 적용한 것이 의심스럽다는 거다. “법과 양심에 따라” 결정했을 텐데 과연 한자로 어떤 양심이냐는 거다.
법원의 구속취소에 즉시항고도 보통항고도 하지 않고 석방한 검찰은 다시 “구속기간을 때가 아니라 날로 계산하라”고 전국 검찰청에 지시했다. 이게 뭔가. 항고를 포기했을 때는 최소한 앞으로는 시간으로 계산하겠다는 심산으로 봤다. 그런데 윤 대통령에 대해서만 시간으로 특별 적용하겠다는 것 아닌가.
모두들 아예 대놓고 봐주는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는 그야말로 몰염치와 파렴치 나아가 후안무치 아니겠나.
이럴 때 “양심에 털이 났다”고 한다. 당사자들은 털이 안 보일 것으로 믿는 듯하다. 하지만 훤히 보인다. 비(非)자 모습으로 빼곡히 양심을 덮은 털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