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법정에 나타난 메모지에 다시 소환된 6공 비자금 ①

1997년 이후 사라졌던 비자금 꼬리 드러나

2025-03-14 13:00:13 게재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 2심서 증거자료로 900여억원 등장

1995년 수사서 못밝힌 자금 … “검찰·국세청이 실체 밝혀야”

이른바 ‘김옥숙 904억원 메모’로 촉발된 6공 비자금 논란이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범죄수익을 환수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번지고 있다. 1997년 대법원 판결 후 모습을 감췄던 비자금의 꼬리가 드러난데 따른 것이다.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가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옥숙 여사를 검찰에 고발했다고 14일 밝혔다.

환수위는 “김옥숙 여사는 남편인 노 전 대통령의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으로 알려진 범죄수익을 은닉하고 관리해온 범죄자”라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사건 항소심 판결에서 김 여사의 메모가 등장했는데, 이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앞서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5.18기념재단은 최근 성명을 내 “사망을 이유로 추징을 면제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만큼 끝까지 추적해 환수해야 마땅하다”며 “부정축재 재산을 철저히 수사해 불법 자금 흐름을 낱낱이 밝히고 필요한 관련 법안도 속히 개정하여 범죄수익이 가족과 후손에게 대물림되는 일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어 “정의는 결코 타협할 수 없고 반란·내란의 수괴들이 숨겨놓은 부당한 재산은 단 한 푼도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랜저 한대 늘어난 것 외 없다” = 이런 여론에 불을 지핀 것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드러난 2건의 메모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1988년 4월 자신의 재산과 관련해 연희동 집 2억5000만원, 주식 1억3000만원, 예금 3000만원 등 총 5억2000만원가량이라고 밝혔다. 퇴임 직후 그는 측근을 통해 “그랜저 한 대 늘어난 것 외에는 재산이 그대로”라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이 증권가를 중심으로 나돌았다. 이후 서석재 전 총무처장관 등에 의해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문제가 몇 차례 제기됐다.

비자금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1995년 10월 19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다. 당시 박계동 전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원의 예금계좌 조회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 계좌를 비롯해 노 전 대통령 비자금 4000억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 전 의원의 폭로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은 “제발 수사를 해서라도 진상을 꼭 밝혀 달라”며 “ 정말 그 비자금의 주인이 누구인지 우리도 알고 싶다”고 주장했다.

신한은행도 계좌에 대한 해명에 나섰지만 오히려 비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만 드러났다.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가 14일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옥숙 여사를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을 은닉하고 관리한 협의로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사진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 제공

◆사라진 장부에 비자금 수사 한계 = 검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고, 그해 10월 22일 노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씨가 자진 출두했다. 그는 우일양행 명의 차명계좌에 입금돼 있는 돈이 노 전 대통령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것이라 밝혔다. 이 돈은 전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이었던 이태진씨가 관리했다는 것이다.

이씨 증언으로 검찰 수사가 활기를 띠자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원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약 1700억원이 남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수사과정에서 당초 주장과 달리 기업체로부터 3400억~3500억원을 받고,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위해 조성한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과 당선 축하금 1100억원을 합해 4500억~4600억원을 조성했다고 진술했다.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노 전 대통령이 장부를 폐기했다고 주장함에 따라 수사는 그의 진술과 일부 계좌추적에 의존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검찰이 확인한 조성 비자금은 기업인 관련 2838억원 정도였고, 사용내역 역시 3690억원 정도만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 진술만으로 단순 계산해도 비자금 조성내역 1700억~1800억원, 사용 내역 800억~900억원은 당시에도 미궁이었다.

1996년 8월 1심 재판부는 은 노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동안 직무와 관련해 기업인 35명으로부터 받은 2838억원만을 유죄로 인정했다. 2심은 33명으로부터 받은 2628억원으로 추징액을 변경했다.

대법원은 1997년 노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했다. 이후 추징금 중 2379억원이 환수됐다. 이로부터 16년 만인 2013년 노 전 대통령 가족은 미납 추징금 230억원을 완납했다.

◆용서 고민했던 광주의 분노 = 노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는 지난 2019년 8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그해 12월 6일에는 오월어머니집을 찾아 “아버지를 대신해 뭐라도 하고 싶다”며 “광주에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신군부 일원인 아버지 과오를 인정하는 듯한 노씨 태도와 광주를 찾아 사과까지 하는 모습으로 노 전 대통령 가족들은 국민적 공분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진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부터 3년이 지난 2024년 최 회장과 노 관장 사이의 이혼소송 항소심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됐다. 이혼소송의 쟁점인 재산분할 다툼 과정에서 김옥숙 여사의 메모(선경 300억원 포함 686억원, 그 외 218억5000만원 등 총 904억원)가 노 관장측 증거로 제출되면서 꼬리를 감췄던 ‘노태우 비자금’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 전 대통령 가족들이 국민들을 철저히 속여 왔던 것으로 드러나며 국민적 분노에 다시 불을 지폈다.

오월단체들은 “‘추징금을 완납했다’는 허울 뒤에 20년 이상 조직적으로 막대한 비자금을 숨기는 등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빙산의 일각’ 가능성 제기 = 시민사회단체들은 메모지에 드러난 비자금이 빙산의 일각이라고 지적한다.1995년 당시 검찰 수사와 이후 재판의 핵심은 비자금 전모가 아니라 대통령 수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실제로 전체 비자금 중 수사 대상에 올라 추징금으로 확정된 금액은 노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에 기업 35곳으로부터 받은 돈 중 직무관련 대가성이 입증된 범위였다.

검찰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이 5공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별도로 비자금을 마련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6공 비리가 은행권 종교계 슬롯머신업계 등 여러 곳과 연결된 것을 고려하면 다른 경로로 들어온 비자금이 은닉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시민단체들도 노씨 일가에 대해 검찰과 국세청 고발 등으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시민단체 고발로 노태우 비자금 등 은닉 재산을 상속받고 이를 신고하지 않은 노씨 남매에 대해 범죄수익은닉규제처벌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이다. 현재 고발인 조사를 마치고 노씨 일가에 대한 소환조사 등을 검토하고 있다.

국세청도 최근 노씨 남매에 대한 고발 사건을 관할 세무서에 배당했다. 관할 세무서에 고발사건이 배당됐다고 바로 세무조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세청이 일단 조사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앞서 한 시민단체는 지난해 10월 ‘고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300억원 불법 비자금에 대해 조사해 달라’며 국세청 숨긴재산추적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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