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추대론 때문?…중도정체성 흔들려
오세훈 서울시장 불출마사유 뒷말 무성
탄핵민심 못읽고 정책 혼선까지 더해져
“정치인의 생명은 정체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여당 주자들의 잇따른 불출마로 국민의힘 경선판이 출렁이는 가운데 유력 주자였던 오세훈 서울시장의 불출마 배경에 관심이 모인다.
오 시장에게 이번 대선은 사실상 세번째 도전이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실패로 시장직을 던진 2010년이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2021년이다. 당시 오 시장은 2022년 대선을 준비 중이었지만 박원순 전 시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발생한 보궐선거에 소환됐고 다시 서울시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2025년. 때아닌 비상계엄 선포로 대통령 임기가 절반 이상 단축됐고 조기 대선이 예정됐다. 세번째 도전만에 대선 무대에 오를 뻔 했던 오 시장은 출마선언을 하루 앞두고 갑작스레 출마를 접었다.
◆오세훈 “정치인의 생명은 정체성” 평소 강조 = 14일 정치권과 서울시 안팎에서는 오 시장의 불출마 핵심사유로 ‘한덕수 추대론’을 꼽았다. 탄핵 판결 이후 국민의힘은 경선 준비에 들어갔지만 50명이 넘는 의원들이 한 총리 출마 촉구문까지 작성했고 경선이후 한 총리와 단일화를 추진하자는 안이 급부상했다. 오 시장측은 “경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행위”라며 “대선 승리 가능성과 보수 재건 기회도 멀어졌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덕수 차출론’만으론 불출마 배경 설명이 부족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아직 한 대행의 차출이 현실화된 것도 아니고 경선 과정에서 다툴 여지도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오 시장 불출마의 배경이 ‘흔들린 정체성’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 시장은 계엄 직후 가장 먼저 반대 성명을 냈고 이후 탄핵 찬성 입장도 표명했다.
하지만 강성 보수진영의 시위가 격화되고 이들이 당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자 오 시장은 탄핵에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오 시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 “탄핵 민심에 대한 정보판단이 왜곡되니 대선 전략도 일관되게 수립하지 못했다”며 “갈팡질팡하는 사이 토지거래허가제 해제 및 재지정 등 정책 혼선까지 더해졌다”고 말했다. 설상가상 오 시장은 헌재 판결이 임박한 상황에서 기각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는 예상까지 보탰다.
그러나 헌재는 8대 0 전원일치로 탄핵을 인용했고 보수진영에선 헌재 판결에 승복한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오 시장측 인사는 “당시 오 시장은 헌재 결정에 크게 놀란 눈치였다”고 말했다.
◆정체성 흔들리며 스스로 발목 잡아 =
정치권 관계자는 “본인 스스로 정치인의 핵심가치로 꼽았던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결국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중도확장성이 최대 무기인 오 시장으로선 경선에 참여해 탄핵반대 입장을 낼 수도, 이제와서 탄핵에 찬성했다고 외칠 수도 없는 사면초가에 놓였다”며 “이 상황에서 당이 한덕수 차출론까지 꺼내니 오 시장 입장에선 대선에 출마할 명분과 실리, 메시지 전략까지 모두 잃었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업계 한 전문가는 “계엄과 탄핵 등 위기 국면에서 민심파악에 실패하고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탄핵 물결에 덩달아 휩쓸려간 모양새가 됐다”며 “정체성과 그에 기반한 일관된 행보가 정치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