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동차 자존심이 뭉개졌다

2025-04-17 13:00:08 게재

생존 위해 중국에 기술 이전 구걸 … 전기차 배터리·소프트웨어 격차 인정

모터쇼에 전시된 중국 전기차 중국 전기차(EV) 제조업체 BYD의 BYD ATTO 3 차량이 지난 3월 24일 방콕 임팩트 아레나 전시장에서 열린 2025 방콕 국제 모터쇼에서 전시되어 있다. AFP=연합뉴스
“유럽은 중국에 자동차 제조 기술을 가르쳤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고 있다.”

16일자(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는 전기차 시대를 맞은 유럽 자동차 산업의 변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과거에는 기술을 가르치던 유럽이 이제는 기술을 배우는 입장으로 바뀌고 있다. 전기차 전환 속에서 유럽은 기술 패권의 무게중심이 동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독일 완성차 기업들은 과거 중국에 진출해 기술을 전수하며 ‘기술 수출국’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기술을 수입하기 위해 시장 접근을 허용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단순한 시장 전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결정이다. 그 안에는 기술 주도권 회복이라는 숙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럽, 중국과 기술격차 인정 = FT 보도에 따르면 유럽 주요 완성차 기업들은 중국 전기차 제조사의 기술력을 사실상 인정하고 본격적인 기술 협력에 나섰다. 산업의 구조적 변화와 위기의식이 본격화된 것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독일 엔지니어들은 중국 합작 파트너가 내놓은 차량 시제품을 비웃었다. 몇몇 모델은 독일 광고 이미지를 그대로 오려 붙인 듯했다.

하지만 지금, 독일 완성차 기업의 소프트웨어 개발팀은 중국 전기차 기업이 공개한 차량 운영 시스템을 하나의 기준처럼 참고하고 있다.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한 독일 자동차 임원의 이런 발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팬데믹 이후 중국은 자율주행, 배터리, 차량용 소프트웨어 등에서 눈에 띄는 발전을 이뤘고, 유럽은 여전히 내연기관 기술에 머물러 있었다. 기술의 중심은 바뀌었고, 유럽은 그 격차를 인정하고 대응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폭스바겐은 2023년 중국 전기차 제조사 샤오펑(Xpeng)에 7억달러를 투자하며 지분을 확보했고, 수백 명의 엔지니어를 광저우와 허페이의 현장에 파견했다. BMW는 화웨이와, 메르세데스-벤츠는 헤사이(Hesai)와 각각 협력하며 소프트웨어 및 센서 기술을 공유받고 있다. 스텔란티스는 중국 리프모터(Leapmotor)와 제휴를 통해 유럽 판매 확대를 꾀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자동차 산업 행동 계획(Action Plan)’을 통해 전략을 바꿨다. 중국 기업이 유럽 시장에 진입하려면 유럽 기업과의 합작 또는 기술 라이선스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다. 과거 중국이 글로벌 기업에 요구하던 조건을 EU가 역으로 활용하는 모양새다.

◆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 = 업계 전문가들은 이제 기술 협력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한다.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의 레이먼드 창은 “중국에서 외국 브랜드의 시장 점유율이 3분의 1 이상 사라졌다”며 “기술 협력 없이는 유럽 기업들이 회복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특히 ADAS(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 인포테인먼트, 차량 연결성(connectivity) 분야에서 중국 기술은 유럽보다 앞서 있다.

이런 기술 격차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산업 육성 전략에서 비롯됐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 정부는 전기차 산업에 약 2309억 달러(한화 약 310조원)를 투입했다.

스웨덴의 자율주행 트럭 스타트업 아인라이드(Einride) 창립자 로버트 팔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했고, 중국을 과소평가했다”고 말했다. 2019년 완전 자율주행 트럭을 세계 최초로 공공 도로에 투입한 그는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EU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를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전기차 전환은 더디게 진행 중이다. 가격, 충전 인프라, 소비자 수용성의 문제 때문이다. 이에 따라 EU는 규제를 완화하고 산업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이 틈을 타 중국 기업들은 유럽 시장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BYD와 체리(Chery)는 헝가리와 스페인에 생산기지를 세우고 있으며, 리프모터는 스텔란티스를 통해 유럽 유통망에 진입할 예정이다. 이들은 단순한 수출이 아니라 현지 생산을 통해 관세와 규제를 우회하려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선택 강요받아 = 기술 협력의 주도권도 이제 중국에 있다. 과거엔 유럽이 기술 유출을 걱정했다면, 지금은 중국이 자국 기술이 역수출될까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BYD의 멕시코 공장 설립 승인을 보류 중인데, 이는 미국과 유럽으로 기술이 흘러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유럽과 중국은 이제 복잡한 딜레마에 놓여 있다. 유럽 기업들은 미국 시장 접근을 위해 중국과의 기술 협력을 제한할 가능성도 있다. 독일산업연합회(BDI)의 베이징 대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유럽 기업들이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주도권이 바뀐 지금 유럽은 과거의 자존심보다 냉정한 현실을 인정한 채 생존 전략을 택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전략이 기술 주도권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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