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이 혁신이고 혁신이 번영이다
경주에서 열리는 2025년 APEC 정상회의 … ‘연결 혁신 번영'의 의미 찾기
천년고도를 생각하면 햄버거집이 떠오른다. 경주에서 동쪽 바다로 흘러가는 형산강을 따라 걷다가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을 마주한다. 경주시 사정동 터미널 네거리에는 1954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창업한 프랜차이즈 햄버거 레스토랑이 있다. 경주의 ‘버거킹’은 방문객에게 서라벌이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듯 2층짜리 전통 기와집 형태로 되어 있다.

기와집에서 먹는 불맛의 햄버거. 이질적인 두 조합을 마주치게 된 계기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다. 올해 하반기 경주에서 열리는 정상회의에 앞서 경제협력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필자는 한달 새 두번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경주역에서 차량공유 서비스로 전기차를 빌려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기와 지붕의 톨게이트가 나그네들을 환영한다. 가쁜 일정을 쪼개 숨을 돌리려 들른 대릉원 옆 스타벅스에는 좌식 테이블이 놓여있다. 신발을 벗고 방석을 깔고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전통과 현대를 잇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경주다운 발상이다.
예정된 미팅을 모두 소화하고 고속철을 타러 다시 경주역으로 향한다. 운전대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옆 차를 힐끗 쳐다본다. 경주 시내버스에는 2025 APEC 행사를 알리는 광고판이 붙어있다. 올해 APEC 정상회의의 세가지 테마는 ‘연결, 혁신, 번영(Connect, Innovate, Prosper)’이다. 우리말로는 명사지만 영어로는 동사형이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연결하라, 혁신하라, 번영하라’ 정도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혁신가 아인슈타인과 스티브 잡스의 비결
답사를 준비하며 APEC 행사의 성격부터 숙지하지 않은 채 현장에 왔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동시에 미국 실리콘밸리 근무 시절부터 한국에 온 지금까지 수년간 붙들고 있는 주제를 마주한 터라 반가운 마음도 피어오른다. 차량을 반납하고 경주에서 서울까지 오는 두시간 남짓한 동안 연결과 혁신과 번영의 의미를 곱씹는다. 필자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번영하기 위해 혁신해야 하며, 혁신하기 위해 연결해야 한다. 왜 그럴까.
먼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혁신가를 선정해 그들의 비결을 살펴보자. 뉴욕대학에서 전략경영을 연구하는 멜리사 실링 교수는 자신의 연구 대상이 되는 혁신가를 추려내며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우선 과학·기술 분야는 음악·미술 분야에 비해 보다 객관적 접근이 가능하다.
둘째 단번의 반짝 혁신에 그치지 않고 수차례 혁신이 반복된 사람이어야 한다. 끝으로 해당 인물의 전기, 인터뷰, 영상 등 방대한 자료가 존재해야 한다. 실링 교수가 내세운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은 일곱 명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벤저민 프랭클린, 일론 머스크, 딘 카멘, 니콜라 테슬라, 마리 퀴리, 토머스 에디슨, 스티브 잡스. 그중에서도 필자가 혁신 비결을 가장 알고 싶은 인물은 단연 아인슈타인과 잡스다.
아인슈타인 “서로 다른 아이디어의 연결”
1945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책 '수학 분야에서 발명의 심리학'부록에는 아인슈타인이 직접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저자인 프랑스 수학자 자크 아다마르는 책을 집필하며 아인슈타인의 사고 과정을 알기 위해 조사를 실시했다. 한마디로 아인슈타인에게 어떻게 일하는지 작업방식을 물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답신에서 자신의 비결을 밝힌다. “조합놀이가 생산적 사고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인다”고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조합놀이란 과연 무엇일까. 알쏭달쏭한 개념이지만 다행히 지난해 12월 ‘실천적 공중보건’이라는 미국 저널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조합놀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조합놀이는 논리적·감정적 차원을 넘나들며 아이디어를 결합하고 재구성하는 사고 과정”이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영역의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것(connecting ideas from different domains)과 다름없다.
스티브 잡스는 보다 노골적이다. 1996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기술잡지 ‘와이어드’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비결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우선 잡스는 “창의성이란 그저 연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부연설명을 하면서는 그답지 않게 멋쩍은 태도까지 보인다. “창의적 인물에게 뭘 어떻게 했냐고 물으면 그들은 죄책감을 느낄 겁니다. 그들이 진짜 뭔가를 한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무엇이 보였을 테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에게는 너무도 자명하게 보였을 거예요.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연결할 수 있으므로 새로운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 인터뷰가 진행된 때는 잡스가 애플로 귀환하기 직전이다.
연결하고 조합해서 혁신하는 그의 능력은 애플에서 쫓겨난 야인 시절에 갈고 닦은 것이다. 이는 애플 복귀 후 2007년 1월 아이폰을 소개하며 만개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폰은 한 대의 아이팟이자 한 대의 전화기이자 한 대의 인터넷 커뮤니케이터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개념이지만 필자가 학생 때만 해도 이를 실행하려면 분명 세 대의 기기가 필요했다.
잡스 "창의성은 그저 연결하는 것”
여기서 아이폰 탄생의 기반이 된 아이팟 개발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혁신이 어떻게 번영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례연구다. 우선 번영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번영(繁榮)은 ‘번성하고 영화롭게 된다’는 뜻이다. 잘살게 된다는 의미로는 읽히나 완전히 와닿지는 않는다.
롱맨 현대어 영영사전의 풀이를 찾아본다. 어떤 비즈니스가 ‘번영(Prosper)’한다는 것은 “특히 커다란 이윤을 남기는 방식으로 발전한다”는 의미다. 즉 기존 경로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장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해 큰 이익을 보게 된 경우 우리는 혁신을 통해 번영하게 된 사례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아이팟이 그렇다.
아이팟과 같은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가 등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콤팩트디스크(CD)로 음악을 들었다. CD는 소니와 필립스가 공동개발한 디지털 광디스크 데이터 저장 형식이다.
1982년 첫선을 보인 CD는 20년 넘게 음악 애호가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두 회사가 차세대 오디오 포맷 개발에 매진해 1990년대 말 ‘슈퍼오디오CD’를 들고 나온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슷한 시기에 음질은 떨어지지만 휴대성이 뛰어난 MP3 방식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애플은 여기서 새로운 시장 기회를 봤다. 당시 휴대용 음악산업의 지배자였던 소니와 필립스는 CD를 뛰어넘는 음질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플은 ‘1000곡’의 음악을 담을 수 있는 심미적 기기와 이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1000곡을 저장할 수 있는 칩을 마련했고, 1000곡을 손쉽게 탐색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와 스크롤 휠을 디자인했으며, 1000곡을 빠르게 옮길 수 있는 아이튠스를 구현했고, 1000곡을 재생할 수 있는 배터리를 구비했다.
아이팟의 슬로건은 “1000곡을 당신의 주머니에(1000 songs in your pocket)”였다. 예술로서의 음악과 기술로서의 기기를 연결해 그 교차점에 선 인간에게 온전한 경험을 안겨주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애플에게 돌아온 것은 번영이다.
“연결해서 혁신했고 혁신해서 번영했다”
아인슈타인과 잡스는 연결해서 혁신했고 애플은 혁신해서 번영했다. 언제까지나 이들의 꽁무니만 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가 일상에서 구현하려는 연결은 앎과 삶의 조합이다. 알게 된 것을 살면서 투영해 보겠다는 의도다. 그중 하나가 테크놀로지에 과하게 의존하지 않고 결정적일 때는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마음이다.
이번 경주 답사에서도 현곡면에 위치한 기업을 찾아가는 도중 논두렁에 빠질 뻔했다. 한 빅테크의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직감적으로 아니다 싶어 차를 세우고 내려서 길을 확인했다. 도로가 없는데도 내비는 자꾸만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의심하는 태도로 크게 번영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곤경은 면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