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처널리즘’ 징비록이 필요하다
미국 방송인 스티븐 콜베어는 2006년 4월 29일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저널리즘의 행태를 겨냥한 풍자가 날카롭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조지 W. 부시였다.
“백악관 출입기자 여러분, 대통령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결정자(decider)’입니다. 대변인은 그 결정을 발표합니다. 기자들은 그대로 받아 적습니다. 결정·발표·받아쓰기. 맨 아래 자기 이름을 붙입니다. 맞춤법 검사 한번 돌리고 집에 가세요. 가족과 사랑을 나누세요.”
콜베어의 이 연설은 지금도 울림이 있다. 언론과 정치권의 공생관계, 특히 ‘처널리즘(churnalism)’을 이렇게 명쾌하게 꼬집은 말은 드물다. 처널리즘은 한마디로 ‘붕어빵 기사’를 말한다. ‘대량으로 찍어낸다(churn out)’라는 말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합성한 용어다. 즉 공장 기계가 빠른 속도로 똑같은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듯 언론이 같은 자료를 빠른 속도로 베껴 차별화하지 않은 뉴스를 쏟아내는 현상을 뜻한다. 기자가 ‘진실 추구자(truth seeker)’와 ‘감시자(watchdog)’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보도자료에 의존해 ‘그 나물에 그 밥’인 밥상을 내놓는 걸 비꼰 말이다.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베끼기 기사 난무
콜린스가 20년 전 풍자했던 말을 꺼낸 것은 우리 언론의 현실이 답답해서다. 언론의 속보·클릭경쟁이 격화할수록 처널리즘이 난무한다. 레거시매체와 온라인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특정기사를 검색하면 줄줄이 나오는 기사는 전후좌우의 틀이 거의 같다. 특정 사건, 특정 발표자료, 특정 정치인, 특정 연예인 보도가 특히 그렇다.
참 신기하다. 매체가 다르고 소속 기자가 다른데 리드부터 기사 전개, 끝맺음까지 같으니 말이다. 바로 처널리즘이다. 언론계 은어인 ‘우라카이(베껴쓰기)’가 일반화했다. 통상의 매체는 전재 계약을 맺은 통신사 기사를 자사 스타일로 바꿔 자사 기자 바이라인을 달아 보도하기도 한다. 그런 행위도 처널리즘이다. 직접 취재하지 않고 슬쩍 베낀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통신사뿐만 아니라 온갖 매체의 기사를 마치 자사 기자가 취재한 양 둔갑시킨다. 불감증이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윤리강령에도 어긋난다.
연예인 기사를 예로 보자. 특정인의 열애설이나 이혼설, 부동산 기사를 특정 매체가 보도하면 그대로 갖다 보도한다. 클릭 경쟁이다. “배우000이 강남 아파트를 얼마에 사서 얼마에 팔아 얼마를 벌었다”는 기사가 왜 필요한가. 대중이 그런 기사를 원할까. 그런 기사는 연예매체나 다룰 일이다. 한데, 대부분의 매체가 보도에 열을 올린다. 자존심 문제 아닌가. 기자는 명예로 사는 직업인이다.
‘기사는 맨발 위의 난로와 같다’는 말이 있다. 재미가 없으면 금방 클릭해 옮겨간다. 언론사가 독자 확보 경쟁을 벌이는 건 숙명이다. 콘텐츠 승부가 정도다. 바이라인은 기자의 얼굴이다. 자존심이다. 낙종하면 특종으로 갚아야 한다. 물은 먹을 수도, 먹일 수도 있다.
콜린스가 풍자했듯 처널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보도자료를 ‘컨트롤(ctrl)+ c’ 해서 보도하는 건 언론의 정도가 아니다. ‘몰개성화’로는 독자 사랑을 받을 수 없다.
물론 디지털 시대에 속보경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언론사의 비즈니스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처널리즘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기자에게 1일 기사 작성 건수를 할당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기자 평가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 기자가 남의 기사나 기웃거리게 하는 데스크는 어리석다.
클릭 경쟁 지양하고 진실 탐구자 역할을
국내 언론매체는 역대급으로 많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2023년 말 현재 신문 사업체수는 전국에 6218개다. 종이신문은 1348개(21.7%), 인터넷신문은 4870개(78.3%)다. 인터넷신문은 1년 사이 548개(12.7%) 증가했다. 그 많은 매체가 그 많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은 경이롭다. 문제는 그 비법이다.
디지털 환경이 확산할수록 처널리즘은 기승을 부린다. 징비록이 필요하다. ‘여론(Opinion)’의 저자 월터 리프만은 이렇게 말했다. “언론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서치라이트의 빛줄기처럼 암흑 속에 파묻혀 있는 사건을 하나씩 밖으로 비추어 내는 것이다.” 처널리즘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저널리즘의 제1 사명은 진실 탐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