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탄소시장, 새 판 짜기가 시작됐다

2026-05-11 13:00:03 게재

법제화 추진 속 VCM과 ETS역할론 재부상 … 탄소국경조정제 기준가격 발표, 배출권 가격 정상화 시급

국제 탄소시장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인가. 지난달 유럽연합(EU)은 기후 무역 정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EU 집행위원회는 4월 7일 ‘탄소국경조정메커니즘(CBAM)’의 첫 공식 기준가격을 탄소 1톤당 75.36유로로 발표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특정 국가의 탄소 가격이 국경을 넘어 수입 제품에 직접 적용되는 사례다. 2026년에는 분기별로 가격을 산정해 공표하고, 2027년부터는 주간 단위로 발표 체계가 달라진다. 또한 CBAM 인증서 실제 구매는 2027년 2월부터 공동 중앙 플랫폼에서 이뤄진다.

8일 김태선 EU-CBAM 협의회장(나무이엔알 대표)은 “이번 가격 발표는 CBAM 적용 업체들에게 충당금을 쌓아두라는 사전 통지 성격”이라며 “인증서 단가에 수입 수량을 곱하면 비용이 산출되는 만큼 기업들은 2027년 2월 인증서 구매 개시 전에 2026년도 비용을 미리 산정해 재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CBAM은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은 6대 품목을 EU 역내로 수입할 때 해당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양에 상응하는 CBAM 인증서를 구매해 제출하는 제도다. 인증서 가격 산정 방식은 EU 배출권거래제(ETS) 경매 낙찰가의 가중평균으로 계산된다.

김 협의회장은 “CBAM 비용은 제품의 탄소집약도뿐 아니라 수출국과 EU 간 배출권 가격 차이도 반영된다”며 “대한민국 기업 입장에서는 그 비용을 어차피 내야 하는데, 대한민국 배출권 가격이 낮으면 낮을수록 차액이 고스란히 유럽 재원으로 흘러가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배출권거래제는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 총량에 상한선을 정하고 기업별로 배출권을 할당한 뒤 남거나 부족한 배출권을 시장에서 매매하도록 한 제도다. 배출량을 줄인 기업은 남은 배출권을 팔아 수익을 얻고 감축이 어려운 기업은 배출권을 사들여 의무를 이행하는 방식으로 시장 원리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한다.

자발적탄소시장 법제화 추진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와 관계 설정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는 분위기다.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배출권 가격 급상승, 유상할당 문제 여전

최근 대한민국 배출권(KAU26)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1월 톤당 1만400원에서 출발해 △2월 1만2400원 △4월 1만5600원으로 연초 대비 50% 올랐다. 가격은 고공상승 했지만 EU 배출권과 비교하면 1/7 수준에 불과하다. 이 격차만큼 EU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들의 CBAM 비용 부담은 더해지는 셈이다.

김 협의회장은 “대한민국 배출권 가격을 올려도 무상할당 비율이 지금처럼 높으면 EU는 그 가격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다”며 “유상할당을 모든 업종에 걸쳐 확대해야 대한민국 기업들이 CBAM 비용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2025년 11월 11일 제4차 계획기간(2026~2030)의 국가 배출권 할당 계획을 발표하면서 발전 부문의 유상할당 비율은 2030년 50%까지 단계적으로 상향하는 등 일부 비중을 높이기는 했다. 하지만 철강 등 수출 비중이 높은 대부분의 업종(산업부문의 95%)은 100% 무상할당을 유지했다. 그 외 산업 등 발전 외 부문(5%)도 현행 10%에서 15%까지만 확대했다.

배출권 할당 방식은 크게 무상할당과 유상할당으로 나뉜다. 무상할당은 정부가 기업에 배출권을 공짜로 나눠주는 방식이다. 유상할당은 기업이 경매 등을 통해 배출권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탄소 비용 부담이 커지는 만큼 감축 유인이 강해진다. EU 역시 ETS 초기에는 무상할당 중심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2013년부터 유상할당을 원칙으로 전환했다. 발전 부문은 이미 100% 유상할당이며 CBAM 적용 대상 업종의 무상할당은 2034년 전면 폐지된다.

위장환경주의로 신뢰도 하락 극복 어떻게

최근 대한민국 탄소시장에는 또다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바로 자발적탄소시장(VCM) 논의가 활발하다는 점이다. 자발적탄소시장은 법적 의무 없이 기업이나 개인이 자발적으로 탄소 감축 실적을 사고파는 시장이다. 온실가스를 줄이기 어려운 기업이 산림 보호·재생에너지 등 감축 프로젝트에서 발생한 크레디트를 구매해 자체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는 데 활용한다.

VCM과 ETS는 성격이 다른 시장이다. ETS는 정부가 총 배출 상한을 정하고 이를 초과한 기업에 벌금을 부과하는 법적 의무 시장이다. VCM은 기업이 자발적 기후 목표를 위해 민간 레지스트리에서 크레디트를 사는 시장으로 참여도 자율이고 강제도 없다. ETS는 정부가 발행한 배출권을, VCM은 민간이 인증한 크레디트를 거래한다. VCM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감축 효과 측면에서의 정확성과 영구성, 검증 측면에서의 개방성과 투명성 등 무결성이 중요한 요소다.

대한민국 국회와 정부는 VCM 법제화를 추진 중이다. 한국거래소 내 통합 시장을 구축해 올해 말 시장 개설을 목표로 기반시설 구축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사실 VCM 활성화 방안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2년 당시 산업통상자원부는 ‘민간주도 탄소시장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고 국내 금융사들도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2023~2024년 국제 VCM 시장은 심각한 신뢰 위기를 겪으면서 국내 시장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2023년 1월 가디언(The Guardian)·독일 디차이트(Die Zeit)·비영리 탐사보도기관 소스머티리얼(SourceMaterial) 등은 국제 탄소시장 인증 기관인 베라(Verra)가 인증한 열대우림 탄소크레디트의 약 94%가 실제로 탄소 1톤 감축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동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베라는 위성 이미지 기반 연구가 사업별 삼림 훼손 요인을 고려하지 않아 잘못된 결론을 냈다며 공식 반박했다.

이후 국제 VCM 시장은 급격히 위축됐다. ‘포레스트 트렌즈 에코시스템 마켓플레이스’의 ‘2024 자발적 탄소시장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전체 거래량은 2022년 대비 56% 감소했다. REDD+ 크레디트 가치도 62% 하락했다. 시장 규모도 2021년 20억달러 정점에서 2023년 7억2300만달러로 축소됐다. REDD+는 개발도상국의 산림 벌채와 황폐화를 줄여 탄소 흡수원을 보전하는 유엔 기후협약 체계의 탄소 감축 메커니즘이다. 산림 보호 실적을 탄소크레디트로 전환해 거래할 수 있도록 한다.

탄소감축을 위한 시장별 역할 논의부터

이처럼 신뢰 위기를 겪은 국제 VCM 시장은 이후 품질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자발적탄소시장무결성위원회(ICVCM)가 제정한 핵심탄소원칙(CCP·Core Carbon Principles)이 고품질 탄소크레디트의 국제 기준선으로 자리잡는 분위기다. CCP의 핵심은 △추가성 △영속성 △강력한 검증 가능성 등이다.

탄소크레디트 독립 평가기관인 실바라 (Sylvera)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기준 투자등급(BBB+) 크레디트 가격은 저등급 크레디트 대비 약 2.5배 높은 수준에서 거래되며 고품질과 저품질 간 가격 격차는 계속 벌어지는 추세다.

이는 대한민국 기업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EU는 2026년 9월부터 검증되지 않은 탄소크레디트에 기반한 탄소중립 제품 광고를 법으로 금지한다. EU 소비자권한부여지침에 따라 CCP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저품질 크레딧을 구매한 뒤 탄소중립을 표방하는 기업은 EU 수출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이 VCM에 참여할 때 크레디트 품질 기준을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오대균 국가녹색기술연구소장은 “VCM이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현재 우리나라 탄소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은 파리협정이 아닌 교토의정서 시대의 낡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파리협정은 각국이 자국 감축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민간과 시장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인데, 우리는 아직 정부가 할당하고 규제하는 교토의정서식 사고에 머물러 있다”며 “파리협정 관점을 반영해 시장 틀을 새로 만들고 그에 맞는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EU-ETS와 VCM의 경계는 흔들리고 있다. EU가 자체 개발한 탄소제거·농업탄소 인증 프레임워크(CRCF)의 크레디트를 ETS 의무이행 수단으로 인정할지를 가를 평가 보고서 제출 시한이 두달 앞으로 다가왔다. CRCF는 직접 공기 포집(DAC)·바이오에너지 탄소포집저장(BECCS) 같은 기술적 탄소제거와 이탄지 복원·재조림 같은 농업·산림 활동으로 흡수한 탄소를 EU가 직접 인증하는 제도다. 2024년 11월 발효됐으며 올해 첫 인증이 시작된다. 설계 자체는 자발적 시장용이지만 이를 ETS 의무이행에도 쓸 수 있도록 할지가 이번 논의의 핵심이다. 유럽집행위원회는 7월 31일까지 CRCF 크레디트의 의무이행 활용 가능성을 포함해 탄소제거를 EU-ETS에 편입하는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유럽의회와 EU 이사회에 제출해야 한다. 집행위가 보고서를 바탕으로 입법 제안을 내면 의회와 이사회가 심의에 들어간다.

CRCF가 두 시장의 경계를 흔드는 이유는 그 성격이 VCM과 ETS의 중간 어딘가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베라 △골드 스탠다드(Gold Standard) 같은 기존 민간 레지스트리와 달리 EU 정부가 직접 인증하는 공공 체계이면서도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설계됐다. 만약 CRCF 크레디트를 ETS 의무이행에도 쓸 수 있게 되면 자발적 시장용으로 설계된 인증서가 법적 의무 시장에 편입되는 것이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

알기 쉬운 용어설명

■파리협정 =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채택한 기후변화협약이다. 전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1.5℃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목표다. 선진국에만 감축 의무를 부과한 교토의정서와 달리 모든 국가가 자국 상황을 반영해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스스로 설정하는 상향식 방식을 채택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 국제사회에 감축이행을 약속하는 구속력 있는 목표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5년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유엔에 제출해야 한다. 새로운 NDC는 기존 수치보다 높은 수준으로 설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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