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법 찾아야 할 한미동맹의 난제들
전작권 전환·방위비 협상 … 민주적 책임성 있는 새 정부가 해결해야 할 몫
배신은 우리가 믿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싶었던 것에 대한 벌이라고 했다. 지난 몇달간 우리는 국내정치적으로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어왔던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으로부터 배신을 경험했고 국제적으로는 풍요와 안정의 상징처럼 여기던 자유주의 국제질서로부터 배신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믿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도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언제나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는 자만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값비싼 대가를 치렀으니 이제는 교훈을 얻을 차례다.
우리는 지난 겨울 내내 내란사태를 겪었고 이제 막 국민의 힘으로 그 위기를 넘겼다. 민주주의가 서구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에 동양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점진적이지만 공고하게 체제적 전환을 이뤄낸 한국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러한 자긍심이 지난 12.3 친위쿠데타로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 민주주의는 강한 회복력을 보여주며 내란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아픔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강한 생명력을 이어갈지 사회 내부의 양극화가 깊어질지는 아직 모른다. 민주주의의 회복은 한국의 국가경쟁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민주주의 회복이 국가 경쟁력의 밑천
한국이 직면한 국제정치적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난해하다. 미국과 중국의 명운을 건 전략경쟁이 시작된 이후로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중국과는 이른바 ‘사드사태’ 이후 악화된 관계가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비교적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전쟁에 남북한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냉랭하게 변했다. 이제는 러시아가 북한에 첨단무기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일본은 최근의 급격한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진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아예 ‘적대적 2국가론’을 내세우며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단절을 선언하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시쳇말로 견적이 나오질 않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다름 아닌 동맹국 미국의 변심이다. 한국에게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국가안보의 핵심축이자 경제발전의 기반이었다.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국은 전쟁의 상흔을 빠른 속도로 극복하고 경제를 재건해 나갔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서구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정착시켰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믿었던 미국의 변화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에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세계 증시가 폭락하고 환율이 널뛰는 상황은 마치 경제위기 상황과도 매우 흡사하다.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트럼프 2기 정부의 미국우선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트럼프는 1기 정부에서도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과격하지는 않았다. 트럼프 2기는 마치 사전에 치밀한 군사작전을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전격적이고도 파격적으로 관세폭탄을 전세계에 융단폭격하고 있다. 이러한 관세폭탄의 대상에 미국의 동맹국들이 마치 시범케이스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한국도 트럼프의 관세폭탄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우리 기업들이 앞다투어 미국에 직접투자를 약속하면서 트럼프의 눈에 들고자 노력했지만 트럼프정부는 이러한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우리의 더욱 큰 문제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에 관련된 문제들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문제였지만 트럼프는 동맹국들에 가혹할 정도의 청구서를 내밀기 시작했다. 우리와 관련된 문제들만 하더라도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역할 조정의 문제, 방위비 분담금 증액에 관한 문제, 전작권 전환과 관련된 문제, 중국 견제와 관련된 주한미군의 역할 조정 문제, 한미일 군사협력 문제 등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최근에 만난 미국의 외교 당국자는 트럼프정부가 제기한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패키지 딜’에 관해 우리의 입장을 물었다. 아울러 이러한 패키지 딜을 현재 한국의 과도정부가 수행하는 것에 대한 한국 측의 입장을 궁금해했다. 패키지 딜에 대한 의견은 둘로 나뉜다. 어차피 트럼프 대통령이 얻고자 하는 것을 줄 수밖에 없는 한국의 처지에서 하나를 주고 다른 하나를 얻는 것이 이익이라는 시각과 각각의 사안을 분리해서 각자의 논리로 방어해야 한다는 시각이 대립한다. 관세문제는 관세문제대로 경제협력의 관점에서 방어하고, 안보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가지는 이해관계를 이용해서 방어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맹의 위기, 민주 정부가 끌어낼 기회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한미 간의 협상을 탄핵된 윤석열정부에서 임명된 과도정부가 수행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다. 미국으로서는 가능한 한 빨리 협상을 진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예한 25% 상호관세가 7월 초 끝나기 때문에 지금부터 빠르게 협상을 타결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아울러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되지 않아 민주적 책임성이 부족한 한국 과도정부와의 협상이 미국의 입장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트럼프정부의 태도를 고려하면 미국은 협상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내려 할 것이고 만약 우리 정부가 이러한 미국의 압박에 과도하게 양보하게 된다면 또 한 번 국민적 저항과 비판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협상은 한달여 남은 선거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될 새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안보적 관점에서도 트럼프정부는 한미동맹에 많은 변화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한미동맹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전작권 전환 문제를 전향적으로 고려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전작권 전환에 대한 논의는 정권에 따라 그동안 많은 부침을 겪었다. 그러나 세계 5, 6위권 군사강국으로 꼽히는 한국이 국가 주권의 핵심인 전작권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우리의 능력을 핑계 삼아 우리의 안보를 동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벗어날 때가 되었다. 능력은 우리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해야 길러질 수 있는 것이다. 곁눈질로 배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동맹국의 역할을 강화하려고 하는 트럼프정부의 정책을 좋은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전작권을 가져오는 것은 동맹국이 안보에 더 많은 부담을 담당해야 한다는 트럼프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는 차원에서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작권 전환, 미국의 전향적 입장이 기회
트럼프정부가 공언하고 있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 문제에도 이러한 전략은 유효하다. 어차피 방위비 분담을 늘려야 한다면 전작권 전환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력의 공백을 메우는 방향으로 분담금을 늘려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미국의 첨단무기를 구매하거나 양국의 방위산업 협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분담금의 사용을 유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이 될 수 있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에 관련된 가장 민감한 문제는 주한미군의 역할과 임무 조정에 관한 것이다. 미국은 최근 국방정책차관에 지명된 엘브리지 콜비가 제기한 것처럼 주한미군을 북한이 아닌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전환하려고 하고 있다.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미국이 동아시아의 지역 안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공식적이고 명시적으로 주한미군의 역할을 중국 견제로 조정하는 것은 한국에는 엄청난 외교안보적 부담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제기한 ‘하나의 전구’ 개념처럼 한국을 미중, 중일 간의 분쟁에 연루시킬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미 협상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위기는 기회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명언이다. 한국은 지금 국가적 위기상황이다. 그리고 그 위기상황을 잘 극복하고 있다. 한미 협상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번 선거에서 문제해결 능력과 실용적 관점을 가진 정부의 탄생이 절실하다.

한국국제정치학회 차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