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국비 앞에 작아진 지방자치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지난 22일과 24일 이틀간 15개 시·도지사를 차례로 만났다. 병원에 입원해 일정을 맞추지 못한 이철우 경북지사 말고는 15개 시·도 수장들이 직접 서울과 세종으로 향했다. 면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 시·도는 보도자료를 냈다. 단체장 사회관계망에는 박 장관과 건의서를 맞잡은 사진이 ‘국비 확보 총력’이라는 설명과 함께 올라왔다.
들고 간 요구서는 묵직했다. 서울시는 아동수당과 지하철 노후시설 개선 등에 5528억원, 대구시는 신공항과 인공지능·로봇산업 등에 4026억원을 요청했다. 경기도는 교통·환경·체육 분야에 4219억원, 경남도는 남부내륙철도 등 7개 사업에 3169억원을 요구했다. 부산시 요구액도 2272억원에 달했다. 16개 시·도의 공개자료에서 금액이 확인된 사업만 더해도 2조4000억원에 육박한다. 액수를 공개하지 않은 사업까지 포함하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국비가 확보돼야 멈춰 있던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산업단지와 복지사업도 굴러간다. 단체장이 장관에게 직접 사업을 설명하면 예산안에 한 줄이라도 더 반영될 것이라는 기대도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이 풍경은 성과라기보다 지방재정의 민낯에 가깝다. 주민이 직접 뽑은 광역단체장이 중앙부처 장관 앞에서 지역사업의 절박함을 설명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치적으로 내세운다.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지방정부는 여전히 중앙정부가 쥔 예산에 기대고 있다. 국비 확보 능력이 유능한 단체장의 기준으로 통하는 현실도 그대로다.
더 씁쓸한 장면은 따로 있다. 28일 열릴 예정이던 민선 9기 첫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총회는 참석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연기됐다. 예산처 장관과의 개별 면담에는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지방정부의 공동 현안을 논의할 자리에는 시간을 내지 못한 셈이다.
순서가 뒤바뀌었다. 단체장들이 먼저 머리를 맞댈 곳은 장관실이 아니라 시도지사협의회 총회여야 한다. 지역별 사업비를 조금 더 받아내는 경쟁을 넘어 국세와 지방세 구조, 국고보조사업에 따라 늘어나는 지방비 부담, 지역 간 재정격차를 어떻게 바꿀지 공동의 해법부터 찾아야 한다. 개별적으로 중앙정부의 문을 두드리는 방식으로는 국비 의존만 깊어질 뿐이다. 각 시·도가 따로 움직일수록 중앙정부의 예산 조정권과 배분권은 오히려 더 강해진다.
중앙정부를 찾아가는 데는 부지런하면서 함께 제도를 바꾸는 일에는 소홀하다면 재정분권을 말하기 어렵다. 지방자치의 힘은 장관과 찍은 사진이나 건의서의 두께가 아니라 주민 뜻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재정에서 나온다. 국비 확보를 자랑하기에 앞서 국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부터 함께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