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신뢰’는 할인되지 않는다

2025-04-23 13:00:02 게재

회계감사는 단순한 재무정보 검토 행위가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에게 기업의 재무제표의 신뢰도를 보증하는 공적 절차다. 감사인은 독립된 제3자의 입장에서 회계정보의 진실성을 검증하며 이는 자본시장 전반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지지하는 기둥 역할을 한다.

필자는 감사보수는 단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신뢰’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낮은 보수를 지급하는 기업은 “값싼 감사품질도 괜찮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반면 높은 감사품질을 원하는 기업은 그에 걸맞은 보수를 기꺼이 지불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유사한 규모의 기업 간 보수 차이로 나타난다.

최근 금융위원회는 회계·감사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에 한해 외부감사인 주기적 지정제 유예를 허용하는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는 감사위원회의 독립성과 감사인 선임절차의 투명성이 입증된 기업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취지로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이 같은 자율 선임 기조가 감사보수 할인 경쟁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 외부감사 자유선임으로 전환된 기업들을 중심으로 회계법인 간 보수 인하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특히 대형 회계법인은 경쟁력을 앞세워 기존 지정 보수보다 30% 이상 낮은 가격으로 제안하고 있으며 중소형 회계법인은 생존을 위해 더 낮은 가격을 부를 수밖에 없는 출혈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회계법인 간 보수 인하 과열 경쟁 벌어져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회계법인 내부의 구조적 요인도 존재한다. 대형 회계법인은 수직적 통제체계를 갖춘 ‘원 펌(one firm)’ 구조를 운영하고 있지만 영업 측면에서는 부문·본부·파트너 단위로 수주 실적을 독립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인사 자금 회계 품질관리는 통합적으로 관리하면서도 유독 영업에 있어서는 법인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인 간 또는 부서 간 실적 경쟁이 과열되면 감사품질보다는 수주 실적에 몰두하게 되고 이는 감사보수 인하를 통한 고객 유치라는 왜곡된 선택으로 이어진다.

결국 회계법인 스스로가 품질 중심의 경쟁이 아닌 가격 중심의 경쟁에 빠지게 되는 셈이다. 회사의 제품을 영업사원마다 각기 다른 가격으로 판매한다면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회계법인도 회계감사 서비스에 통일된 가격정책이 있어야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해법은 제한적으로 기업 경영자, 감사위원회, 감사인 모두의 성숙한 책임의식 없이는 근본적 개선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제안을 해본다.

첫째, 감사위원회의 감사인 선정 기준에서 ‘보수 항목’의 비중을 낮추고 품질과 전문성 중심의 평가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감사위원회는 외부감사인을 선정할 때 ‘감사보수’를 주요 평가 항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감사품질이라는 비거래적 특성을 가격이라는 거래기준으로 환원시킨 자기 모순적 오류다. 감사위원회는 기업 재무정보 신뢰성 확보의 1차적 책임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외부감사인 선임 시 가격을 주요 고려사항으로 삼는 것은 스스로의 책무를 저버리는 행위다.

감사수수료가 낮아질수록 감사인의 독립성과 품질은 저하될 수밖에 없고 이는 감사위원회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감사위원회가 ‘값싼 감사’를 고르는 순간 그 기업의 회계투명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둘째, 회계법인은 현재와 같은 파트너 간 가격경쟁 관행에서 탈피해 내부적으로 감사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 감사보수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 감사를 수행하고 의견을 형성하는 전 과정에 대해서는 철저한 품질관리정책을 유지하면서 정작 중요한 품질유지요건인 적정보수에 대한 정책에는 소홀한 측면이 있는데 이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적정보수 정책 소홀 바로잡아야

2014년 봄, 현대캐피탈의 정태영 회장은 한국의 낮은 회계감사보수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감사인에게 보수를 3배 인상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과 보수는 부실감사를 유발하고, 주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그의 발언은 당시에도 회계업계에 큰 울림을 주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몇몇 특정인의 선의에 기댈 일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결단의 의미를 지금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다.

윤길배 공인회계사 BDO성현회계법인 대표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