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하락의 덫에 걸린 국제사회

2025-04-25 13:00:01 게재

전쟁자금 마르는 러시아, 수출전략 흔들리는 미국 … EU는 탈러시아 로드맵

지난 2월 미국 텍사스주 미들랜드 인근 퍼미안 분지 유전의 원유 매장지 근처에서 펌프 잭이 작동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2025년 상반기 국제 유가의 급락이 세계 에너지 질서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석유 수출에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러시아, 에너지 수출을 전략 무기로 활용해 온 미국, 러시아 의존 탈피에 속도를 내는 유럽연합(EU)까지 각국의 에너지 전략은 중대 고비에 직면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의 증산 결정이 시발점이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 3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러시아·이라크 등을 포함한 8개국은 향후 18개월 동안 하루 220만 배럴의 원유 생산을 점진적으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이는 지난 2년간 유지된 감산 기조를 정면으로 뒤집는 조치였다.

발표 직후 브렌트유는 배럴당 70.60달러까지 하락하며 5개월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1월 고점 대비 10% 넘게 하락한 수치다.

러시아는 직격탄을 맞았다. 4월 12일자 FT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올해 예산을 우랄산 원유 기준 배럴당 69.70달러로 설정했으나 실제 시장 가격은 50달러 안팎까지 떨어졌다.

그 결과 약 1조루블,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세수 결손이 불가피하다. 국가 재정의 3분의 1 이상이 에너지 판매 수입에 의존하는 러시아에 이 손실은 전쟁 자금의 고갈로 이어진다.

T-인베스트먼트의 소피아 도네츠 이코노미스트는 “이 가격이 유지된다면 러시아는 군사 외 지출을 삭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크렘린은 이미 국가복지기금의 유동 자산을 대거 소진했고, 중앙은행 외환보유고 3400억 달러는 서방 제재로 동결돼 있다.

키이우 경제대학의 벤자민 힐겐스톡은 “기금이 연말까지 유지되기 어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크렘린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도 “상황은 감정적으로도 매우 긴장돼 있다”며 이례적으로 위기감을 인정했다.

더구나 유럽연합(EU)은 러시아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을 근본적으로 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2주 안에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 중단을 위한 로드맵을 발표할 것”이라고 24일 밝혔다. 발표는 내달 6일경으로 예정돼 있으며, 2027년까지 완전 중단을 목표로 한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더는 에너지 수요를 적대적 국가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으며, 미국산 LNG 수입이 여전히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이 강조한 에너지 수출 외교와 맞닿아 있다.

폰데어라이엔은 “에너지 위기 당시 미국, 노르웨이, 한국, 일본의 협력을 기억한다”고도 밝혔다.

미국도 에너지 수출 전략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4월 22일자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흑자국에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를 압박하고 있으나, 동시에 시행한 고율 관세가 자국 셰일 산업의 비용 부담을 키우고 있다. 철강·알루미늄 등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시추와 수송 인프라 건설이 제약되고, 수출 확대에도 한계가 생기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은 노스다코타에서 나타난다. FT에 따르면 바켄 분지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2010년대 셰일 붐의 상징이었지만 현재는 유가 하락과 무역 정책 여파로 세수와 고용이 급감했다. 던 카운티와 맥켄지 카운티는 인프라 투자 계획을 줄이고 있고, 주민 불안도 커지고 있다.

지역 석유협회는 “현재 상황이 지속되면 셰일 산업 전반이 구조적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수출 시장에서도 미국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은 무역 전쟁 이후 미국산 LNG 수입을 전면 중단했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아시아의 LNG 수요 증가율이 2024년 5.5%에서 2025년 2%로 급감할 것이라 전망했다.

유럽은 기후 규제와 가격 변동성 우려로 미국산 LNG와의 장기계약을 꺼리는 분위기다. 우드 맥켄지는 “EU가 모든 석유 제품을 미국에서 조달하더라도 무역 흑자의 절반 정도만 상쇄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영국의 에너지 컨설팅사 에너지 애스펙트의 암리타 센은 OPEC+의 증산이 단기적으로는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지만 연말에는 과잉 공급으로 인한 추가 가격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OPEC+는 “시장 상황에 따라 증산 계획을 조정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브렌트유는 이미 하락 추세에 들어섰다.

이처럼 2025년의 유가 하락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질서 재편의 시발점이자 에너지 패권을 둘러싼 각국의 약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신호로 읽힌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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