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윤석열의 유산과 지도자 덕목
6.3 대통령선거가 40여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세간 분위기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정치권만 후보선출에 부산할 뿐 정작 주권자인 국민은 심드렁한 표정들이다.
하긴 IMF외환위기보다 더 심각한 경제한파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할 서민 입장에서 대선은 ‘당신들만의 잔치’일 수도 있겠다. 보나마나한 경선판을 벌이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상황이나, 내란의 폐허 위에 고만고만한 후보들이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는 국민의힘 사정도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일 것이다. 게다가 “누가 해도 윤석열보다 못할라구”라는 식의 지도자에 대한 기대치 절하도 한몫 거들고 있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리더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격 미달의 대통령이 통치할 때 사회가 얼마나 큰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지는 지난 3년 윤석열이 확실하게 보여줬다. 철학과 비전부재의 무능한 리더십은 나라를 하루아침에 후진국 반열로 추락시킬 수 있음을 주권자들이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권력에 대한 경계심, 관용과 자제의 덕목 갖추길
그런 만큼 다음 리더십은 단순히 ‘윤석열 지우기(ABY, Anything But Yoon)’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국정운영의 차원을 달리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아예 재기불능이 될 수도 있다. 한때 세계 5대 경제대국이었다가 60위권의 후진국으로 추락한 아르헨티나 사례는 결코 먼 나라 일이 아니다.
작금의 엄중한 시대상황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에게, 그리고 선택을 앞둔 주권자에게 ‘지금 대한민국에게 요구하는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거듭 묻게 만든다.
시대를 떠나 언제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제1 덕목은 ‘권력에 대한 경계심’일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권력에 내재한 비극성’을 경계하지 못하는 권력자는 그 권력의 칼에 베이기 십상이다. 윤석열의 비극은 대통령권력이 법 위에 있다고 착각한 데서 비롯됐다. 다기화한 민주사회 대한민국을 ‘검사스럽게’ 통치하려다 12.3 내란사태라는 자멸의 수를 둔 것이다.
문제는 민주당도 권력의 비극성에 무디다는 사실이다. 문재인정권이 5년 만에 정권을 헌납한 데는 촛불민심을 뒷배로 완장권력을 휘두른 민주당의 ‘운동권스러운’ 통치가 한몫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윤석열을 괴물로 만든 권력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또 다른 윤석열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관용과 자제’도 지도자에게 절대 필요한 덕목일 것 같다. 헌법재판소도 지적했듯이 윤석열 탄핵의 가장 큰 사유는 ‘관용과 자제’를 바탕으로 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군을 동원해 위헌·불법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이다. 쪽수만 믿고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던 민주당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버드대 교수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혐오할 수도 있지만 그들 역시 나라를 생각하고 헌법을 존중한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지게 되고, 윤석열 사례에서 보듯 정권도 버림받게 돼 있다.
또 하나, 지금 같은 시대상황에서는 ‘지도자로서의 균형감’도 더 없이 중요한 덕목이라 하겠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충돌하는 시대를 헤쳐나가야 할 지도자에게 균형감은 결코 놓아서는 안될 가치다. 한쪽으로 치우친 외눈박이식 국정운영은 윤석열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켜 결국 스스로를 옭아매는 덫이 될 것이다.
자격 없는 이가 권좌에 앉으면 나라도 자신도 불행해져
일찍이 공자는 천하를 사사롭게 운영하는(天下爲家) 군주를 비판하며 ‘합리적 예(禮)를 갖추지 못한 이가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회는 재앙(如有不由禮而在位者 則以爲殃)’이라고 질타한 바 있다.(孔子家語, 禮運편) 시쳇말로 풀이하자면 지도자의 덕목을 갖추지 못한 이가 권좌에 앉으면 나라도 자신도 불행해진다는 정도의 의미일 게다.
이 시대를 감당하겠다는 사람 중에 자신이 국가와 사회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한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을 때는 나름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지 않았을까. ‘재앙정치’가 윤석열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는 얘기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이 잠시라도 ‘지도자의 덕목’을 잊어서는 안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남봉우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