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 대규모 정전…비상사태 선포
통신·교통망 마비, 복구 진력
한국인 피해 확인되지 않아
스페인 전력망 관리업체 레드엘렉트리카는 “정전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오후 8시 35분 기준, 스페인 전체 전력 용량의 약 35%가 복구됐다”고 발표했다. 스페인 내무부는 즉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교통과 통신 장애로 인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했다.
블룸버그와 로이터에 따르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도심에서는 신호등이 꺼져 극심한 교통혼잡을 불렀다. 경찰은 주요 교차로에 투입돼 수신호로 차량을 통제했다. 또 지하철과 고속열차가 정지하고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갇히는 사고가 잇따랐다. 일부 고속열차 승객은 철로 위로 대피해야 했다. 마드리드 오픈 테니스 대회 경기는 전력 중단으로 경기가 중단됐다.
호세 루이스 마르티네스-알메이다 마드리드 시장은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시민들에게 이동을 최소화하고 현재 위치에 머물러 달라고 호소했다. 오스카르 푸엔테 교통부 장관은 “전력 복구가 완료되기 전까지 중장거리 열차 운행 복구는 어렵다”고 밝혔다. 수많은 시민이 버스를 기다리다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거나 임시 표지판을 들고 이동 수단을 찾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AP통신에 따르면 리스본 공항은 터미널을 폐쇄했고, 수백 명의 관광객들이 야외에서 비행기 운항 재개를 기다려야 했다. 포르투갈에서도 리스본뿐 아니라 북부와 남부 지역까지 정전이 확산했고, 병원과 긴급 서비스는 자체 발전기를 이용해 필수 진료와 대응을 이어갔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대국민 담화에서 “사고 원인에 대해 결론적인 정보는 없다”면서 “추측을 삼가고 공식 발표를 기다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정전이 발생한 직후 마드리드와 리스본을 비롯한 주요 지역에서 약 60%의 전력 수요가 5초 만에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유럽 송전 시스템 운영자 네트워크(ENTSO-E)와 협력해 정전 원인 조사를 진행 중이다.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현재까지 사이버 공격 징후는 없다”고 발표했고, 포르투갈 국가 사이버보안센터와 정부 관계자들 역시 “이번 정전은 분배망 문제로 보이며 외부 공격 징후는 없다”고 확인했다.
포르투갈 전력공급업체 E-Redes는 수력과 열병합발전소 가동을 재개했으며, 병원과 대중교통에 전력을 우선 공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력회사 REN의 조앙 콘세이상 이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스페인에서 시작된 큰 전압 변동이 포르투갈 전력망까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은 전체 전력의 약 43%를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으며, 원자력 발전이 20%, 화석연료 발전이 23%를 차지한다.
전문가들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라 전력망 관리의 복잡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전은 시민 생활 전반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중앙은행은 전자금융 서비스가 백업 시스템으로 “적절히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지만, 시민들은 ATM 작동 중단과 결제 불능 사태로 큰 불편을 겪었다. 마드리드 슈퍼마켓에서는 진열대가 비워지고 긴 줄이 이어지며 생필품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졌다.
주스페인 한국대사관은 “현재까지 우리 국민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임수석 대사는 “정전 직후 대사관도 통신이 두절 돼 여행객들은 본부 영사콜센터와 소통해야 했다”고 밝혔다. 일부 한국 국민은 기차 운행 중단, 카드 결제 불가 상황에서 대사관을 찾아왔으며, 대사관 직원들이 직접 차량으로 이들을 여러 호텔로 안내해 후불 결제로 임시 숙소를 마련했다. 대사관은 비상발전기를 통해 업무를 유지했고, 28일 저녁 9시경 전력이 복구됐다.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는 전력 복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스페인은 프랑스와 모로코에서의 전력 수입을 중단하고, 수력 및 복합화력 발전소의 생산을 증대시켰다. 포르투갈 정부는 긴급 내각회의를 열고 대처 방안을 논의했으며, 군과 경찰 병력을 피해 지역에 추가 배치했다.
유럽에서는 이번 사태를 2003년 9월 28일 이탈리아 대정전, 2006년 11월 4일 독일 전력망 사고 이후 보기 드문 대규모 정전 사례로 기록하고 있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에너지 공급망 안전성을 확보하고 전력망 복원력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29일까지 전 국민 전력 복구를 완료하겠다고 약속하며 “이번 위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