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법은 최소한의 기준이다

2025-05-07 13:00:51 게재

사법부 존재감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전직 대통령의 운명도 새 대통령 후보의 출마 자격도 헌법재판소 대법원 등 사법기관이 좌우하는 판이니 가히 사법부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이제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부의 정치화’ 같은 얘기도 일상적 용어가 됐다.

법과 법률기관에 눈길이 모이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참에 법치의 중요함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확산된다면 민주주의 회복에 적잖은 보탬이 될 것이다. 허나 법의 힘이 어느 때보다 커진 이른바 ‘만사법통’ 국면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바로 법이 규정한 기준은 상한이 아닌 하한선이라는 사실이다.

근로기준법 제3조는 “이 법에서 정한 노동조건은 최저기준이므로 노동관계 당사자는 이 기준을 이유로 노동조건을 낮출 수 없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나쁜’ 사업주들은 해당법이 5인 이상 사업장에 해당한다는 이유 등으로 최저기준을 무시한다.

심지어 최근 노동시장엔 가짜 3.3% 노동자가 늘고 있다. 노동자이지만 계약서상 사업소득세를 원천징수하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된 이들을 말한다. 노동자를 위장등록해 4대보험이나 근로기준법상 의무를 피하는 것이다.

할 일은 제대로 안했으면서 ‘최소’ 활동기간은 엄격하게 지키는 경우가 있다. 전세사기특별법이 그렇다. 지금도 매달 피해자가 800~1000명씩 확인되고 있는데 정부는 이달말로 예정된 특별법 적용기간을 ‘준수’할 참이다.

‘최소한을 정한다’는 법정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최고권력자들이다.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라 정권과 관리자는 불가피한 최소한의 기록만을 기록물로 지정해야 하는데 박근혜정부 문재인정부는 물론 윤석열정부도 원하는 모든 기록을 30년 보존 기록물로 지정했다. 정권이 여섯번 바뀐 뒤에나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안전문제로 넘어 오면 ‘법적 기준’은 생명을 좌우하게 된다. 최근 서울에서는 잇달아 지반침하 사고가 발생해 시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지하안전법에 따르면 지하동공을 탐사하는 지표투과 레이더(GPR) 조사는 연 1회 의무적으로 하게 되어 있다. 사고가 연달아 발생하고 시민 불안이 커지자 서울시는 법이 정한 횟수를 무시(?)하고 ‘월 1회’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법적으로 비공개해도 무방한 지하안전지도도 공개 여부를 검토키로 했다.

“법적 기준을 다 따랐다” “법적으로 걸릴 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책임있는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써서는 안될 언어다. 본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가져다 쓰는 ‘법’에선 공직자와 정치인의 최우선 책무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로 규정하고 있다. 착각하지 말자. 법은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며 지속가능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약속이지 결코 면죄부가 아니다.

이제형 자치행정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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