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섬백길 걷기여행 21 제주 우도올레

제주 해녀항쟁의 역사가 깃든 우도올레

2025-05-07 13:00:24 게재

우도비양도의 빛. 사진 섬연구소 제공

요즈음의 제주 우도는 낭만적인 섬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우도는 구좌와 함께 일제강점기 제주 해녀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제주 전역에서 1만7000명의 해녀가 참여한 해녀항일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여성사회운동이었다.

우도에는 제주올레 01-1코스인 우도올레가 있다. 백섬백길에서는 61코스로 선정했다.

우도올레는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천진항에서 출발해 하우목동 해변, 산물통, 하고수동 해변을 지나 다시 천진항으로 돌아오는 13.2㎞ 코스다.

속도가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 우도올레에서는 이륜차 등의 차량을 이용하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우도의 내밀한 속살을 엿볼 수 있다. 길을 걸으면 현무암지대와 홍조단괴가 부서져 생긴 이국적 해변은 물론 땅콩밭이나 보리밭에서 일하는 섬 주민들에게 오래된 돌담과 방사탑에 깃든 사연도 들을 수 있다.

우도 천진항에는 해녀항쟁기념비가 우뚝 서 있지만 여행자들 대부분은 무심히 지나친다. 섬에 갔으면 섬이 지나온 역사의 일부라도 알게 되면 좋지 않을까.

비석에는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구속됐던 우도 출신 강관순이 작사한 ‘제주 해녀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강관순은 감옥에서 해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해녀가를 만들었고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었다. 그렇게 제주의 모든 해녀들이 부르게 됐다.

노래비에 새겨진 가사라도 읽어보라. 해녀들을 향한 깊은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올 것이다. 그분들이 섬을 지켜낸 덕에 여행자는 오늘 아름다운 우도를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우도는 오랫동안 조정에서 소(牛)와 말(馬)을 가두어 기르던 목장으로 이용됐다. 1800년 초부터 사람의 거주가 시작됐다. 물소가 머리를 내민 모양(牛頭形)이라고 해서 소섬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한때는 연평리(演坪里)라 불리기도 했다. 1900년 서당 훈장 오완철이 우도가 ‘물에 뜬 두둑’ 같다고 한 데서 연평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1986년 4월 1일 우도면으로 승격될 때까지 섬은 구좌읍 연평리였다.

우도올레를 걷다 보면 작은 저수지들이 많이 보인다. 이 저수지들은 우도의 ‘물통’이다. 어째서 저수지를 물통이라 했을까? 우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저수지의 물을 마시고 살았기 때문에 식수를 담아둔 ‘물통’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물통은 방목하는 말 등 동물의 배설물과 뱀, 개구리, 장구벌레 들 때문에 오염이 심했다. 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많은 사람들이 간장질환 등 풍토병에 시달렸고 아이들의 익사 사고도 잦았다. 그래서 물을 길어다 담아두던 가정의 물통에는 금붕어를 길러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 를 퇴치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가뭄이 심하면 이 더러운 물통들마저 말라버려 섬은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는 몰래 물을 훔쳐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물통을 지키기 위해 마을끼리 싸움도 자주 일어났다. 물 전쟁이었다. 그래서 우도에는 쌀 도둑은 없어도 물 도둑은 있다 했다. 심지어 제주 본섬 성산포나 종달리까지 왕복 4시간씩 노를 저어 물을 공수해 먹기도 했다.

근래에 제주 본섬의 물이 해저관로로 공급되면서 우도의 물 문제도 해결됐다. 참으로 고단한 섬살이 끝에 얻은 일상의 평화였다. 이제 우도의 물통은 ‘물은 생명’이란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통이 되었다. 물통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거든 탈 것을 놔두고 올레를 걸어보라. 미지의 우도와 조우하게 되리라.

백섬백길: https://100seom.com

공동기획: 섬연구소·내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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