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환율 혼란, 달러회피 조짐 맞물려

2025-05-12 13:00:16 게재

주요수출국들 최대 2.5조달러 축적 추산 … 외신들 “각국·기업, 불안정한 달러에 대안 적극 모색”

최근 아시아 외환시장은 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대만달러 가치가 급등해 단 이틀 만에 달러 대비 10% 올랐다. 이후 약간 진정됐지만 이달 들어서만 6% 상승했다.

대만 수출업체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대규모 축적해 왔다. 대만 국내은행에 예치된 예금 중 약 16%가 외화표시다.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달러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일부 수출기업들이 달러를 대만달러로 급속히 전환하면서 환율이 하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건 대만 보험업계일 수 있다. 대만 보험사들이 자산으로 보유한 달러 규모가 엄청나다. 지난 10년간 약 700억달러가 쌓였다. 이 중 약 3분의 1은 환헤지가 없다. 이들 보험사는 현재 대규모 장부손실을 안고 있다. 보험사들은 자산 상당 비중을 달러로 갖고 있지만 고객에게는 대만달러로 보험금을 지급한다. 때문에 자산-부채 불일치 상황이 발생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 케이티 마틴은 11일 “대만달러 가치의 급격한 상승속도는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다. 시장의 어떤 자산 클래스든 직선으로 상승하거나 하락하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다. 피해가 현실화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결국 누군가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고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될 수 있다. 아시아 투자자들은 환율충격에 불안감을 느껴 달러보유분을 직접 매도하거나 추가로 환 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다. 이는 달러가치를 더 하락시키는 요인이 된다.

유럽계 자산운용사 ‘유리존SLJ’의 스티븐 젠도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전문가 중 하나다. 그는 지난주 보고서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5년간 아시아 주요 수출국들이 최대 2조5000억달러를 축적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금리 차이나 상대적인 재정상황, 밸류에이션, 지정학적 요소 등 기초 거시경제 조건의 변화가 달러의 예상치 못한 매도세를 촉발할 수 있다”며 “이는 ‘테일리스크(발생 가능성이 낮지만 발생할 경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위험)’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중요한 요소다. 달러약세를 통해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다는 미란보고서가 그 배경이다. 미국이 개별국가들과의 무역협상에서 달러약세를 강요할 수 있다는 게 시장 일각의 의심이다. 물론 트럼프정부는 이런 아이디어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대만달러 등의 가치상승은 미국이 환영할 만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때문에 시장은 각국 통화가치가 개별 무역협상에 어떻게 반영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UBS 환율분석가 샤하브 잘리누스는 “관세협상에 환율이 잠재적인 요소가 된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시장이 그런 가능성을 믿는다면, 혼란이 커질 수 있다. 투자자와 투기세력들이 협상을 앞두고 미리 나설 것이기 때문에 환율시장이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환율 요동치고 외환거래 늘어

환율의 요동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외환거래가 늘어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4월 DXY 지수(달러와 주요 통화바스켓의 변동성을 비교하는 지표)의 변동성 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거의 2배 급등했다.

세계 최대 파생상품거래소인 CME그룹의 올해 1분기 외환거래량은 전년 동기 대비 25% 증가했다. 일일 평균 선물·옵션계약 거래량은 110만건에 달했다. 트럼프정부가 해방의 날 관세정책을 발표한 다음날인 지난달 3일(현지시각), CME 현물외환거래 플랫폼인 EBS의 거래량은 147억달러로 202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3월 5일 독일의 추가 국방지출 발표 이후 유로-달러 거래량은 137억달러를 기록해 올해 1일 평균의 2배를 넘어섰다. 5월 2일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협상 개방 신호를 보내자 EBS 달러-대만달러 1개월 선물계약 거래량이 6억달러를 넘어 하루 기준 기록을 경신했다.

데이터 제공업체 NCFX의 폴 램버트는 “전세계 1일 거래규모 7조500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시장은 고도로 유동적이며 24시간 운영된다. 투자자들은 정상 거래시간 외 뉴스에 즉시 대응할 수 있다”며 “외환거래 증가의 대부분은 환율리스크를 제한하려는 기업과 투자자들로부터 비롯된다. 다국적기업들은 해외 매출과 비용을 헤지하고 투자자들은 해외통화표시 자산을 보호하려 한다”고 말했다.

달러우회 움직임 커져

이런 가운데 아시아를 중심으로 달러 우회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9일 “은행과 중개업체들은 무역긴장이 장기화되면서 달러를 우회하는 통화파생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외환거래 중 현지통화 간 자금이체의 경우 대개 중개통화인 달러를 거친다. 예를 들어 필리핀 페소를 원하는 이집트 기업은 자국 이집트파운드를 달러로 환전한 뒤 다시 그 달러로 페소를 구매한다. 미국 노스이스턴 경영대 파브리시우스 소모쥐 교수의 최근 추산에 따르면 달러를 중개통화로 사용하는 거래량은 달러 1일 거래량의 약 13%를 차지한다.

블룸버그는 “하지만 기업들이 달러의 중개역할을 건너뛰는 전략을 점점 더 모색하고 있다. 이는 기축통화인 달러를 외면하고 있다는 신호”라며 “최근 달러가치 급락은 무역긴장에 대한 시장의 단기적 불안감을 반영했다. 하지만 달러의 사용방식과 사용주체에 대한 구조적 변화는 달러 탈피의 장기적 추세를 가리키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금융협회(IIF) 중국리서치 담당자인 진 마는 “달러 이외 통화간 거래 증가의 대부분은 기술발전과 유동성 증가 때문”이라며 “거래당사자들이 달러를 사용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든다고 느끼기 때문에 거래가 자연스럽게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한 상품거래업체 관계자는 블룸버그에 “유럽과 다른 대륙의 금융기관들이 달러를 배제한 위안화 파생상품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관계자들은 “중국 본토와 인도네시아, 걸프지역 간 상업적 유대 강화가 달러 외 통화의 헤지 수요를 촉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의 한 금융기관 트레이더는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이 유로-위안 헤지를 늘리고 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에서 영업하는 한 외국계은행 임원은 “현지고객들의 위안-루피아 거래 지원을 위해 올해 전담팀을 꾸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물론 시장참여자 대부분은 달러회피 움직임이 급격히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우선 달러를 대체할 현실적인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 은행간통신협회(SWIFT)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년간 글로벌 거래에서 유로화 사용량은 감소했다. 또 중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무역에서 위안화 사용은 여전히 신기한 현상쯤으로 여겨진다.

달러대체 변화 진행중

스위프트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3월 글로벌 결제에서 위안화 비중은 약 4.1%로, 달러의 49%에 비해 크게 낮다. 하지만 중국의 결제는 점차 자체시스템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데, 거래량이 빠르게 늘고 있다. 중국 ‘국경간 위안화 지급시스템(CIPS)’을 통한 연간 거래량은 지난해 약 175조위안(약 24조달러)에 달했다. 전년 대비 40% 이상 성장률을 기록했다.

또 올해 3월 중국 투자자와 무역기업이 국경 간 거래에서 위안화를 사용한 비중은 역대 최고인 54.3%, 금액으로는 7249억달러에 달했다. 달러는 41.4%였다. 2018년 위안화 20%, 달러 70%였던 것에서 크게 바뀌었다. 중국 수출업체들도 벌어들인 달러를 위안으로 속속 환전하고 있다. 위안화 약세 우려로 달러로 바꿔 보유하던 이전 추세와 정반대 움직임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3월 중국의 동남아 수출은 5년 전 동월 대비 80% 이상 늘었다.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로에 대한 수출은 2배 이상 증가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에 대한 수출 성장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위안화 기반 헤지 전략은 달러 기반보다 일반적으로 비용이 더 높다. 하지만 기반하는 위안화 대출금리가 낮기 때문에 차입자의 총 비용은 높지 않을 수 있다. 프랑스 투자은행 ‘나티시스’의 아태지역 수석이코노미스트인 알리시아 가르시아 헤레로는 “달러로 자금을 조달하는 비용의 3분의 1로 위안화를 조달할 수 있다”며 “물론 위안화는 아직 글로벌 유동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도이체방크 분석가 올리버 하비는 최근 보고서에서 “달러의 놀라운 지속력을 고려할 때, 이를 대체하려면 국제적 환경에서 진정으로 시대를 바꾸는 변화가 필요하다”며 “하지만 바로 그런 변화가 진행중이라는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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